감동은 그대로… 임윤찬의 새로운 ‘라흐마니노프’

최여경 기자
최여경 기자
수정 2026-11-09 00:53
입력 2026-11-09 00:53

지휘자 마린 알솝과 3년여 만의 재회

알솝, 2022년 콩쿠르 결선 지휘자
임윤찬과 대화하듯 선율 주고받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같은 곡… 호흡·속도 다른 연주 주목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지휘자 마린 알솝이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 마린 알솝 with 임윤찬’에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며 눈을 맞추고 있다. 두 사람은 2022년 6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함께 이 곡을 연주했다.
목프로덕션 제공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 마린 알솝 with 임윤찬’에서 임윤찬(22)이 연주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낯설었다. 예습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조성진(32)·다닐 트리포노프(35)의 연주와도,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 영상 속 그 자신과도 달랐다.

닷새 연속 협연으로 팬들이 걱정한 ‘혹사 논란’이 무색하게, 그는 4년 전과 다른 호흡과 힘, 속도로 곡을 풀었다. 마치 다른 해석을 들려주러 무대에 선 듯이.


지휘봉은 그날 결선의 마린 알솝(70)이 다시 잡았다. 2023년 여름 미국 무대 이후 같은 곡으로는 3년여 만의 재회다. 이 악단 수석 객원지휘자인 알솝은 서른 번 넘게 피아노를 돌아보며 호흡을 맞췄고, 악단은 임윤찬과 대화하듯 선율을 주고받으며 루바토(템포를 유연하게 늘이고 당기는 표현)를 고스란히 받아 냈다.

임윤찬은 1악장 제1주제를 학자가 연구하듯 꼿꼿이 앉아 천천히, 정확하게 열었다. 기막힌 강약 조절로 악단과 어우러지던 연주는 카덴차(협연자가 홀로 기량을 펼치는 대목)에서 돌변했다. 육중한 화음의 오시아(악보에 표기된 대안 판본) 대신 가볍고 경쾌한 판본을 택하되 저음엔 굉장한 힘을 실었고, 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호른이 주제를 이어받을 땐 물 흐르듯 여린 배경음을 깔았다.

카덴차 후반, 강렬한 화음 진행 끝에 길게 숨을 고르는 특유의 호흡도 여전했다. 제1주제가 돌아오기 전 여운을 남기려는 침묵이었다. 오른손으로 재빨리 땀을 훔치는 모습에선 미동 없는 자세 뒤의 열기가 읽혔다. 돌아온 주제에선 왼손의 묵직한 울림으로 장엄함을 쌓았다.



애절한 2악장에선 왈츠풍 화음 패시지(빠른 음표가 이어지는 악구)를 미스터치 없이 무아지경으로 통과했다. 아타카(쉼 없이 다음 악장으로 넘어감)로 이어진 3악장의 초고속 연타와 화음 도약 앞에서도 한 음 한 음이 또렷했다. 양손으로 건반이 부서질 듯 내리쳐도 음은 뭉개지지 않았고, 빠른 속도에도 구조미를 단단히 세웠다.

임윤찬 이전 유튜브에서 많이 재생된 연주는 1978년 뉴욕 에이버리 피셔 홀 실황이다. 그 영상 속 일흔다섯의 호로비츠가 극강의 테크닉 앞에 나이를 드러냈다면, 임윤찬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대목조차 초연하고 유연하게 풀어내며 나이를 앞질렀다. 유튜브 조회 수도 2000만회를 넘기며 호로비츠를 넘어섰다.

그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피아노 소나타 8번’ 2악장을 앙코르로 남기고 퇴장했다.

2부는 이날만의 프로그램이었다. 협연 없는 관현악 공연에 임윤찬이 더해지며, 다른 날의 새뮤얼 바버(1910~1981) ‘교향곡 1번’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 ‘불새’ 모음곡 대신 ‘돈 후안’과 ‘대학 축전 서곡’이 놓였다.

알솝은 이제 내 시간이라는 듯 포디움(지휘대)을 넓게 쓰며 춤추듯 지휘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돈 후안’에선 풍성한 현과 하프로 무도회 같은 낭만을 그려 비극적 결말을 부각했고, 맨 끝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대학 축전 서곡’은 타악기의 짜릿한 마무리로 박수를 끌어냈다. 악단의 앙코르는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의 ‘슬라브 무곡’이었다.

2022년 6월 세계에 이름을 알린 열여덟 살은 4년 동안 같은 곡을 거듭 새로 그려 왔다. 이날 객석은 변화를 눈앞에서 확인하며 그 과정을 함께 지나온 이들이 됐다. 한국 관객에게 각별한 알솝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9년 만이자 열 번째 내한을 이끌며, 협연자에겐 판을 깔아 주고 두툼한 현과 부드러운 관악의 색을 끌어내는 명지휘자임을 증명했다.

최여경 선임기자
2026-11-0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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