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 위협에 갇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선진국은 어떻게 대응했나?
이병문 기자
수정 2026-11-06 17:23
입력 2026-11-06 17:23
미국 풋스위치·2인 1조 진료, 일본 카스하라 방지법, 영국 무관용 정책
의료진 보호가 곧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통합 안전 시스템 구축 시급
‘제2의 임세원 사건’ 막으려면 사법입원제 및 국가 지원책 등 마련해야
의료진을 보호하고 의료기관 내 폭행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일명 ‘임세원법’이 도입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진료실 내부의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 지난 2018년 12월,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고(故) 임세원 교수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고 이후 사회적 분노와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이는 의료기관 내 보안인력 의무 배치, 비상벨 설치, 폭행 처벌 수위 강화 등을 골자로 한 법적·제도화 조치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장의 의료진이 체감하는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현행 제도가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에만 보안 인력 배치 조항을 적용하거나 단순 형량 강화 위주의 법 개정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작 의료진이 가장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진료실 내부의 물리적 안전 공간 구축이나, 치료를 거부하는 고위험 환자에 대한 사전 대처 체계는 여전히 법적·제도적 사각지대로 남아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 사이에는 “정신질환자를 오래 치료하다 보면 의사도 환자처럼 미쳐간다”는 서글픈 우스갯소리가 전해진다. 이는 치료 과정에서 겪는 엄청난 감정 노동과 억압된 중압감,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극단적 행동에 상시 노출된 의료진의 생생한 피로감과 절박함을 비유한 말이다.
물론 대다수 정신질환 환자는 다른 일반 진료과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롭고 성실하게 치료에 임하며 의료진과 소통을 이어간다. 문제는 정신건강 장애가 극심한 상태에서 적절한 약물 치료나 관리가 끊긴 일부 중증 환자들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환각과 망상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을 돕고자 하는 의료진을 오히려 공격 대상으로 삼는 비극을 낳는다.
문제는 이러한 피습 위험이 반복될수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의 사기 저하와 현장 이탈 현상이 심각해진다는 점이다. 최전선에서 중증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던 숙련된 전문가들이 위험과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진료실을 떠나게 되면, 그 피해는 결국 적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할 수많은 선량한 환자들과 사회 전체의 안전망 붕괴로 돌아가게 된다.
의료진을 향한 폭력과 피습 사건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주요 선진국 역시 과거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폭제 삼아 강력한 보호 체계와 시스템적 대응책을 단계적으로 수립해왔다.
미국은 1960~70년대 인권 보호와 항정신병 약물의 발달을 이유로 대형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환자들을 지역사회로 돌려보내는 ‘탈수용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정신보건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치료와 주거지를 잃은 중증 정신질환자들이 거리로 쫓겨나 노숙인이 되었다. 약물 복용이 끊긴 환자들은 극심한 망상과 환각으로 공격성이 극대화되었고, 주요 대학병원과 지역 정신보건센터에서 의료진을 향한 흉기 난동이 잇달았다.
이전까지 폭력을 단지 ‘직업적 위험(Occupational Hazard)’으로 치부하던 미국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안긴 사건은 2006년에 발생했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부소장을 지낸 세계적 정신의학자 웨인 펜튼 박사(Dr. Wayne Fenton)가 조현병 치료를 받던 19세 남성에게 폭행당해 숨지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조차 혼자 진료할 때 방어 수단이 없으면 목숨을 잃는다”는 잔혹한 현실은 법과 제도의 대대적인 개편을 이끌어냈다.
미국 직업안전보건청(OSHA)은 Healthcare 및 사회복지 종사자를 위한 폭력 예방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며, 미 의회 역시 법안(Workplace Violence Prevention for Healthcare and Social Service Workers Act)을 추진하며 물리적 안전대책을 강화했다. 이는 △진료실 설계 표준화 △2인 1조 진료 동석 △풋스위치·웨어러블 비상벨 설치 △사법정신의료 및 강제입원 체계 등이다. 진료실 설계 표준화는 의사가 환자에게 가로막혀 갇히지 않도록 이중 출입문(Secondary Exit)을 배치하고, 흉기로 쓰일 수 없는 무거운 고정식 가구를 배치하도록 했다.
2인 1조 진료 동석은 공격성이 우려되는 중증 환자 진료 시 보안요원이나 동료 간호사가 2인 1조로 동석한다. 풋스위치·웨어러블 비상벨 설치는 단순 벽면 비상벨은 환자를 자극하거나 즉시 누르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의사 발밑의 풋스위치(Foot Pedal)나 개인 착용 무선 비상 알람 장치를 도입했다. 사법정신의료 및 강제입원 체계는 폭력성이 높거나 치료를 거부하는 중증 환자를 의사 개인의 위험 부담으로 남겨두지 않고, 법원과 지자체가 개입해 치료받게 하는 사법입원제와 지역사회 강제 외래치료명령 등을 적극 도입했다.
일본 역시 정신질환자의 범죄와 의료기관 내 폭력 사건을 겪으며 정책을 발전시켜 왔다. 1984년 우쓰노미야병원 사건을 계기로 환자 인권을 강화한 정신보건법을 제정했으나, 장기 입원 구조와 지역사회 관리 부재는 여전히 과제였다. 2001년 8명의 아동이 사망한 오사카 이케다 초등학교 흉기 참극 이후, 일본은 2003년 ‘의료관찰법’을 제정해 심신상실·미약 상태에서 중대 범죄를 저지른 정신장애인에 대해 법원 심사를 거쳐 지정 의료기관에서 전문 치료와 재범 방지를 받도록 하는 사법-의료 연계 체계를 구축했다. 의료기관의 방재와 물리적 인프라의 중요성을 일깨운 사건도 있었다. 2021년 12월 오사카 정신과 의원 방화 사건으로 원장을 포함해 26명이 숨지면서 의료기관의 출입구 및 대피로 확보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최근 일본은 노동정책 관련 법률을 개정해 사업주가 고객 등의 과도한 괴롭힘과 폭력을 방지하도록 하는 일명 ‘카스하라(고객 괴롭힘) 방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병원 역시 적용 대상이다. 환자나 보호자의 폭언·폭력으로부터 의료진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 신고, 경고, 출입 제한 등의 대응 방침과 조직적 상담 창구를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요구하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의료진에 대한 폭력을 감수해야 할 일로 보지 않고, 적극적인 위험 평가와 법적 대응을 통해 예방해야 할 범죄로 다룬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는 1999년부터 ‘NHS 무관용 구역(Zero Tolerance Zone)’ 캠페인을 펼쳤으며, 폭력 환자를 일반 진료 명단에서 제외하고 보안이 강화된 별도 지정 기관에서 진료받게 하는 ‘폭력 환자 특별배정제도(Special Allocation Scheme·SAS)’를 운영 중이다. 또한 2018년 ‘응급근로자 폭행 처벌법’을 제정해 의료진 폭행 시 최고 징역 2년까지 처벌을 강화했다. 의료기관 내부에는 지역 보안관리 전문가(LSMS)를 배치하여 사건 예방과 경찰 협력을 전담하게 한다.
프랑스는 보건부 산하에 ‘국가 의료현장 폭력 관측소(ONVS)’를 두고 의료기관 내외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위협 사례를 국가 차원에서 수집·분석하여 예방 정책의 근거 데이터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의 임세원법이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건 발생 후 사후 처벌 강화에만 치중되어 있고, 진료실 내부의 물리적 안전 인프라 구축이나 실질적인 예산 지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의사가 진료실에서 언제 흉기에 찔릴지 모른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환경에서는 환자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도, 진정성 있는 치료도 기대할 수 없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안심하고 진료 현장을 지키고 선량한 환자들이 안전하게 치료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대책이 시급히 추진되어야 한다.
먼저, 진료 공간 안전 기준의 표준화 및 법제화이다. 미국처럼 의사 갇힘을 방지하는 진료실 내 이중 출입문(비상 대피로) 설치를 의무화하고, 흉기 활용을 막는 보안 가구 배치 및 발밑 풋스위치·무선 비상 알람 시스템 보급을 표준화해야 한다. 둘째, 보안 인력 및 안전 인프라 비용의 국가 지원이다. 대형 재단 병원뿐만 아니라 위험에 직면해 있는 중소 병·의원까지 실질적으로 보안 인력을 고용하고 안전 설비를 갖출 수 있도록 ‘안전 인프라 수가’를 신설하고 직접적인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셋째, ‘중증 정신질환 국가책임제’ 및 사법입원제 도입이다. 치료 중단 위험이 있거나 폭력성이 수반되는 중증 환자의 관리 책임이 개인 의사나 가족에게만 전가되어서는 안 된다. 사법기관과 지자체가 개입하는 사법입원제 및 지역사회 강제 외래치료명령 제도를 도입해 국가가 치료 체계를 책임져야 한다.
의사를 향해 휘둘러진 흉기는 단순히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이는 한국의 정신건강 의료 체계 전체를 찌르는 흉기와 같다. 주요 선진국들이 비극을 거치며 정교한 안전망을 짜 올렸듯, 우리 정부와 국회 역시 처벌 위주의 미봉책에서 벗어나 시스템적 안전망과 국가 책임 관리를 조속히 완성해야 할 때다.
이병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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