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보석(保釋)과 보방(保放)

서동철 기자
수정 2026-11-05 01:26
입력 2026-11-04 22:54
하루 전에도 멀쩡하던 사람이 수사기관에 불려가면 갑자기 휠체어를 탄 채 중병에 걸린 표정을 지으며 TV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조선시대 벼슬아치 사이에서도 드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성종실록에는 1486년 군기시 정 안호가 옥에 갇혔는데, 아프다는 이유로 의금부가 보방(保放)을 청한 기사가 나온다. 임금은 “조사(朝士)가 갇히면 반드시 병을 칭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며 혀를 차면서도 윤허했다. 군기시는 병기를 만드는 관청으로, 정은 최고 관직이다. 조사는 관리를 말한다.
세종실록의 1449년 보방 기록도 흥미롭다. 일본인 쇄미구라(灑未仇羅)는 상주 객관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도절제사 행차의 취각(吹角) 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심부름하던 김보산 등에게 물었다. 이들은 장난기가 발동해 “당신을 잡으려 한다”고 했고 쇄미구라는 마을로 도망쳐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김보산 등은 이 일로 여러 해를 갇혀 있다가 이때 풀려났다.
보석(保釋)은 일본이 메이지시대 서양 형사법 체제를 도입하면서 만든 제도와 용어에서 비롯됐다. 보석은 보증과 석방을 합친 말이다. 보방은 동양에서 당나라 형법 당률(唐律)에 나오는 아주 오래된 제도다. 죄수가 중병에 걸리거나, 부모의 장례를 치르거나, 혹한이나 혹서가 닥치거나, 국가에 채무를 갚아야 할 경우 보증을 세우고 일시적으로 풀어주는 제도다.
보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보방 기사만 773건에 이른다. 조선시대엔 금전적 담보 대신 차지(次知)라는 인적 보증도 활용됐다. 죄수 대신 갇히는 차지는 가족이나 노비는 물론 고용된 사람도 있었다. 짐작처럼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양반 죄수가 수감을 피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병보석에도 장거리를 오갔다는 통일교 총재의 행태에 보방의 폐단이 겹쳐진다. 법원이 보석을 취소한 것은 아주 오래된 편법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도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2026-11-05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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