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섬 위 ‘검은 성벽’… 탐라국 역사·문화 깃들다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서동철 기자
수정 2026-11-05 01:28
입력 2026-11-04 22:10
제주목 행정·군사 요충지 ‘제주읍성’
외국인 관광객 몰리는 ‘제주목 관아’삼국시대부터 지방행정기관 역할
외적 침입 방어·선박 관리 등 맡아
화산서 생성된 현무암으로 쌓은 성
군사적 기능과 함께 홍수 예방 염두경복궁이 역사도시 서울의 분위기를 주도한다면 제주목 관아는 제주에서 같은 역할을 한다. 제주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오늘날의 제주시 일대를 관할하던 지방행정기관이었다. 필자가 찾은 날, 제주목 관아에서는 외국 관광객들이 경복궁에서 흔히 보던 모습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제주목 관아 자리는 탐라국의 치소 터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탐라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전기에 이르는 동안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백제·중국·일본과 교역하던 정치체를 가리킨다. 탐라국의 지배자는 성주(星主)라 불렸는데 고려 전기에도 그 지위를 상당 부분 인정받았다. 탐라국은 섬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제주읍성은 제주목의 행정 및 군사 기능을 보호하고자 쌓은 성곽이다. 고려가 1105년(숙종 10년) 제주도 전체를 아우르는 탐라군을 설치하며 축성했다. 공물을 바치는 외번 성격이 강했던 탐라를 고려의 지방행정체계로 편입하는 과정이었다. 읍성은 이미 존재하던 탐라국의 성곽을 적절히 활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고 한다. 제주읍성 남쪽 성곽 바깥의 삼성혈(三姓穴)을 방문했던 분들도 많을 것이다.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땅에서 솟아났다는 탐라국 건국신화의 현장이다. 읍성과 삼성혈 모두 산지천과 병문천이 동쪽과 서쪽을 각각 가로막은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 어렵다. 제주읍성 일대엔 제주도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
제주공항에 내려 제주목 관아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제주시 동쪽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대부분 제주목 관아를 지나는 듯했다. 관덕정(觀德亭)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니 바로 건너편에 제주목 관아가 보인다. 외삼문인 진해루(鎭海樓)와 나란히 자리잡은 관덕정은 이제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관덕’은 유교 경전 ‘예기’에 나오는 ‘사자 소이관성덕야’(射者 所以觀盛德也)에서 비롯됐다. ‘활쏘기로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년) 군사훈련을 위한 지휘소로 세워졌다.
훗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폈던 청음 김상헌은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에 다녀가면서 일기 형식의 ‘남사록’을 남겼다. 그는 ‘제주객사에서 묵었다. 관덕정은 성안에 있는데 그 규모가 가장 넓고 시원했다. 군사들은 연회가 있을 때 이곳에 모인다. 관덕정 앞에는 시도(矢道)와 분혁(粉革)이 있다. 곧 활터다. 찬주당·무기고·동서군영 등 여러 건물이 마주 서 있다’고 적었다.
시도는 화살이 날아가는 공간, 분혁은 과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찬주당은 관덕정 남쪽에 있었다는 판관의 집무공간이다. 제주 판관은 병마수군절제사를 겸한 목사의 군사 보좌관이다. 일대가 군사적 용도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객사는 관아 북쪽 제주북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매표소가 있는 진해루로 제주목 관아 내부로 들어서니 궁궐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규모가 상당하다. 실제로 제주목사는 책임이 막중하면서 권한도 컸다. 제주목은 전라도 산하 지방행정기관이었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가 제주의 행정과 군사 업무를 챙기기란 불가능했다. 제주도는 1416년(태종 16년) 이후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삼읍체제를 조선 말까지 지속했다. 제주목사는 병마수군절제사를 겸직하면서 정의현감과 대정현감을 지휘하는 제주지역 군사 및 행정의 책임자였다.
실제로 제주목은 육지의 다른 지방행정기관보다 훨씬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당연히 해상 방어 체제를 구축해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육지를 잇는 관선을 관리하고 표류한 외국 선박 및 선원 문제를 처리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군마와 역마, 왕실에 공급하는 어승마와 외교마를 생산하고 선적하는 마정(馬政)도 중요했다. 대표적 유배지였던 만큼 유배인 관리도 신경 써야 했다.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제주목의 관아는 읍성 북쪽의 탑동해변과 900m 남짓 떨어져 있다. 제주항과의 거리는 1㎞ 이상으로 더욱 벌어진다. 제주목 관아는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접근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데 묘미가 있다. 관아에서 바다를 오가는 것이 편하면 좋겠지만, 외적을 방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제주읍성은 동·서·남문이 있었지만 바다로 열린 북문을 세웠다는 기록은 없다.
오늘날 제주항은 국제항으로 발전한 모습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파도가 거친 데다 선박이 안정적으로 접안할 수 있는 지형도 되지 못했다. 1735년(영조 11년) 산지천 하구에 방파제를 쌓았다고 하지만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제주항은 20세기 이후 단계적으로 방파제를 넓혀 가며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읍성을 허물고 성돌을 방파제 기초공사에 썼다는 아픈 기억도 있다.
조선시대 제주읍성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견도 없지 않다. 탐라를 이은 고려시대 옛 성이 조선시대 읍성의 서북쪽에 따로 있었는데 훼철됐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의 제주읍성은 조선시대 새로 쌓은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탐라와 고려시대 읍성이 별도로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엔 1408년(태종 8년) ‘제주에 큰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홍수로 제주성의 관사와 민가가 쓸려나가고 곡식은 태반이 침수됐다’는 내용이 덧붙여졌다. 1411년(태종 11년) 실록에는 ‘제주의 성을 수축하도록 명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때 쌓았다는 제주읍성은 산지천과 병문천에 일종의 자연해자 기능을 부여하면서 성곽은 방어를 겸해 홍수를 막는 용도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애초 읍성 내부는 물이 부족했다. 1539년(중종 34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 성곽조는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4394척, 높이는 11척이다. 성안에는 물이 없다’고 적었다. 관아의 우련당 안내판에도 외적의 침입이나 화재 발생을 대비해 1526년(중종 21) 연못을 팠다는 내용이 있다.
을묘왜변이 일어난 1555년(명종 10년) 왜구는 남해안 일대를 휩쓴 것은 물론 제주도에도 상륙했다. 왜구는 제주읍성을 포위했지만 제주목사 김수문이 지휘해 격퇴했다. 10년 뒤인 1565년(명종 20) 후임 제주목사 곽흘은 제주읍성을 확장해 산지천 동쪽 언덕으로 성곽을 넓혀 쌓았다. 산지천은 물론 주변의 가락천(嘉樂泉) 등이 성곽 내부로 들어오면서 식수와 생활용수 부족 문제는 해결된 듯하다.
지금 제주읍성 성곽은 산지천에서 가까운 남쪽 성벽을 복원한 일부 구간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화산 폭발로 생성된 짙은 색의 현무암을 다듬어 쌓은 제주읍성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육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을 보여 준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지난 3월 복원 이후 다시 훼손된 석축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수목에 가려진 축조 당시 성곽의 상부 방어시설인 여장(女牆)을 새로 찾아내기도 했다.
산지천 주변은 이제 문화의 거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 중심에 동문시장이 있다. 관덕정에서 동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산지천 다리 주변에 조성된 탐라문화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의 남쪽으로는 복개한 산지천을 따라 동문시장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재래시장인 동문시장은 관광객의 필수 방문코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동문시장은 이름 그대로 읍성 동문이 있던 자리 주변에 광복 이후 들어선 시장이라고 한다. 광장에서 국립제주박물관으로 가는 동쪽을 바라보면 제주목사 곽흘이 성곽을 새로 쌓았다는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목은 왜변 이후 동쪽의 별도포와 조천포를 육지를 오가는 관공선 포구로 지정했다. 관아에서 직선거리로 별도포는 4㎞, 조천포는 11㎞ 떨어져 있다. 화북진이 있는 별도포는 가까웠지만, 포구로서의 입지는 조천포가 좋았다고 한다.
조천환승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리면 조천포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마을이 끝날 때쯤 비석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 목사와 판관의 선정비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공마감관 오영(貢馬監官 吳永)의 구폐석(救弊石)이다. 글자의 의미대로라면 제주마를 조정으로 올려보내는 과정의 폐단을 덜어준 것을 칭송하는 비석이다.
조천포구는 물길이 간단치 않아 경험이 많은 뱃사람이 아니면 드나들기 어려웠을 것 같다. 포구는 조천진성이 바로 곁에서 호위하고 있다. 조천을 찾으면 조천진성의 연북정(戀北亭)에 올라 보기를 권한다. 이곳에서 제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한동안 말을 잊게 된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2026-11-05 25면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