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반지, 뒷골목의 탐욕을 입다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수정 2026-11-02 00:02
입력 2026-11-01 19:42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여는 서막
게르만 서사를 갱스터극 재해석
부동산·대출 등 자본주의적 욕망
라이브 카메라 활용해 생생하게
국립오페라단의 ‘링사이클’ 프로젝트의 포문을 연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리허설에서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 사랑을 포기하고 황금 반지를 손에 넣은 난쟁이 알베리히(사무엘 윤·왼쪽)가 지하세계 니벨하임에서 다른 난쟁이들을 착취하고 있는 모습.
국립오페라단 제공


“황금이 내게 무한한 권력을 주었듯이 반지의 마법은 반지를 끼는 자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것이다!”(4막 중 알베리히의 노래)

욕망은 숭고하지 않고, 욕망에 찌든 신 또한 성스럽지 않다. 욕망은 외려 보편적이다. 강력한 욕망으로 추동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생생하고 동시대적이다.


국립오페라단이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을 지난달 29일부터 1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렸다. 북유럽 신화와 게르만 서사시를 바탕으로 하는 원작을 현대적인 갱스터 드라마로 재해석했다. 신성이 주는 웅장함이 벗겨진 대신 작품의 근간인 욕망의 서사가 뚜렷하게 살아났다.

‘라인의 황금’은 바그너 필생의 대작인 4부작 연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서막을 여는 작품이다. 전작을 관통하는 사유를 집약한 ‘전야극’으로, 이후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지는 세계관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

‘니벨룽의 반지’가 독일에서 전막 초연된 지 올해로 150년이 됐다. 이를 기념하며 국립오페라단은 ‘니벨룽의 반지’ 전작을 무대에 올리는 ‘링사이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라인의 황금’은 그 시작으로, 프로젝트는 2029년 마무리된다. 전체 연주에만 무려 18시간 가까이 걸리는 대장정의 포문을 연 것이다. 국내 오페라단이 ‘니벨룽의 반지’ 전작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한국 오페라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바위에서 황금을 뜯어내서 복수의 반지를 제련하겠다! 물결이여, 들어라, 나 이제 사랑을 저주하노라!”(1막 중 알베리히의 노래)

세 명의 처녀가 라인강에서 헤엄치며 ‘라인의 황금’을 지키고 있다. 이 성스러운 보물로 반지를 만들면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 사랑의 욕망은 실로 강력하지만, 니벨룽족의 알베리히는 그걸 해낸다. 사랑을 저주하는 그는 라인의 황금으로 반지를 제련한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원히 사는 신 보탄과 로게의 속임수에 넘어가 반지를 빼앗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반지에는 저주가 깃들어 있다. 누구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무엇보다 돋보였던 것은 연출이다. 엄숙한 신들의 성전이 아닌, 지저분한 뒷골목의 풍경을 제시하며 탐욕과 파멸이라는 오페라의 주제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지난해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으로 동시대적 감각을 보여준 로렌조 피오로니가 연출을 맡았다. 연출은 바그너의 신화가 그저 고전으로 박제된 게 아님을 증명한다. 부동산·대출·노동착취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앞세워 인간과 욕망이 결탁한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 드러낸다.

무대 위 라이브 카메라 도입도 신선했다. 중심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서사가 라이브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동시에 전달됐다. 대사와 음악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인물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들의 갈등과 고뇌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세계적인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과 바리톤 양준모가 알베리히를 깊이 있고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신들의 왕 보탄은 베이스바리톤 올렉산드르 푸슈나크와 이상민이 맡았으며, 재치와 꾀를 보여준 불의 신 로게 역은 세계적 테너 조너선 스토턴과 김요한이 소화했다. 개인적으로는 보탄의 성채를 지어준 거인 파졸트를 연기한 류지상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라인의 황금’을 비롯한 링사이클 프로젝트의 모든 공연은 한국 오페라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중요한 기점이 될 전망이다.

“라인의 황금! 순수한 황금이여! 오, 깊은 물속에서 너의 맑은 모습이 다시 빛날 수 있다면! 오직 깊은 물속만이 친근하고 진실할 뿐, 저 위에서 기뻐하는 자들은 거짓되고 비겁하도다!”(4막 마지막, 세 라인 처녀의 노래)

오경진 기자
2026-11-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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