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단속보다 무서운 병원비

이현정 기자
수정 2026-10-26 00:52
입력 2026-10-26 00:04
입원 여드레 병원비 2600만원
미등록 이주민에 진료비 3~4배
일손 기대다 아프면 체류 자격 따져
새 생명을 품에 안았지만 부모는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심장에 작은 구멍이 발견돼 출생 직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입원 여드레 만에 청구된 병원비는 약 2600만원. 부부가 여덟 달을 꼬박 일해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었다.“돈이 하나도 없는데 어쩌나 싶었어요. 제 몸 아픈 건 생각도 안 나고 눈물만 났어요.”
필리핀 출신 하니(가명·42)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민간 단체의 도움으로 급한 불을 끄고 아이의 심장 상태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증세가 나빠지면 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니씨 부부는 미등록 이주민이다. 2015년 입국해 체류 기간이 끝나면서 미등록 신분이 됐다. 부부가 청소 일로 버는 돈은 월 300만원 남짓. 고국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거의 없다. 지금은 아픈 아이를 돌보느라 하니씨가 일을 쉬고 남편 혼자 생계를 짊어지고 있다.
“길을 가다 단속돼 쫓겨나면 어떡하나 밤마다 잠을 설쳐요.” 그런데도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묻자 하니씨는 “고국의 가난이 더 무섭다”고 답했다.
“필리핀에서는 하루를 꼬박 일해도 한국 돈으로 1만 2000원밖에 못 받아요. 오늘 일하지 않으면 내일 먹을 빵조차 살 수 없죠. 서른다섯만 넘어도 나이가 많다며 일자리를 주지 않는데, 마흔 넘은 우리가 돌아가면 무슨 수로 먹고살겠어요. 아픈 아이 병원비는 또 어쩌고요. 돌아가서도 아이 심장을 한국에서처럼 잘 치료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부부의 꿈은 필리핀으로 돌아가 작은 구멍가게를 차리는 것이다. 밑천 1000만원을 모을 때까지 2~3년 만이라도 단속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기를, 아이가 더는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부부는 그마저 기약할 수 없다.
미등록 이주민 의료 지원 활동가들은 이런 사연을 숱하게 접한다고 했다. 약값이 부담돼 약을 먹다 끊기를 반복하고 통증을 참고 버티다 병이 깊어진 뒤에야 응급실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병원비로 진 빚을 갚느라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가 2022~2025년 미등록 이주민 129명을 조사했더니 병원에 가지 못한 이유로 59%가 ‘비싼 의료비’를 꼽았다. ‘단속에 대한 두려움’은 13%였다. 이들에게 병원비는 단속보다 더 높은 문턱이다.
보건복지부는 의료보장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 근로자 등에게 의료비를 지원하지만, 대상은 입원과 수술에 한정된다. 성인의 외래 진료와 약제비는 원칙적으로 제외된다. 약물 치료로 다스릴 수 있는 병조차 비용 부담에 방치하다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이유다.
일부 병원은 미등록 이주민에게도 외국인 의료관광객에게 적용하는 ‘국제수가’를 매긴다. 일반 진료비의 3~4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진료비 선납을 요구하는 병원도 적지 않다. 돈 없어 치료받기 어려운 이들 앞에 문턱을 거듭 쌓는 셈이다.
미등록 이주민의 의료 공백을 말할 때면 체류 자격 논란이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농축산업 현장과 소규모 제조 공장은 이들의 노동력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데, 정작 이들이 아파 쓰러지면 체류 자격부터 묻는다. 비자가 없다고 치료받을 자격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아플 때 치료받도록 하는 일은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 기본적인 인도주의적 책무다. 치료를 미루다 병이 깊어져 생계마저 꾸릴 수 없게 되면 우리 사회가 감당할 비용도 커진다.
하니씨가 꿈꾸는 작은 가게가 언제 문을 열지는 알 수 없다. 그사이에도 아이는 자라고, 심장 상태를 확인할 진료일은 돌아온다. 체류 자격이 무엇이든 아픈 아이를 안은 부모에게 병원 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 다음 진료일에는 병원비 걱정에 발길을 돌리지 않도록.
이현정 경제정책부 차장
2026-10-2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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