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자, 문득 옆 사람이 궁금해졌다

최여경 기자
최여경 기자
수정 2026-10-23 00:23
입력 2026-10-23 00:08

살구 농원 술래잡기/정기현 지음/은행나무/296쪽/1만 8000원

살구나무 도난 좇다 만난 사연들
현실과 환상 넘나들며 흥미 더해
정기현 소설가.
ⓒ한쪽가게


‘살구나무 80여 그루 도난’ 기사가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렸다. 농장 두 곳에서 살구나무들이 밑동만 남은 채 사라진 사건. 3년 전 충남 영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그땐 살구나무 잔해가 있었기에 이번 사건과 다르다. 기사를 읽은 기정은 궁금증이 인다. ‘80그루를 어떻게 싣고 갔지?’, ‘베어다가 뭘 하려고?’

정기현의 첫 장편소설 ‘살구 농원 술래잡기’는 작은 기사 한 편에서 실을 풀어낸다. 기사를 읽은 기정의 감상은 이 소설의 작법이기도 하다. “이전 문단에서 생긴 물음표는 다음 문단에서 바로 소거됨과 동시에 또 다른 물음표가 뒤이어 얼굴을 내밀었다.”(52쪽)


2023년 단편 ‘농부의 피’로 등단한 작가의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덮고 나면 공연히 길을 나서고 싶어지는 소설로 읽혔고, 표제작은 2025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중편 ‘이웃집의 탐스러움’은 담 너머 이웃과 한결 촘촘한 사이를 꿈꾸게 했다. 올해는 단편 ‘그거 점 된다’로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을 품었다. 걷게 하고 다가서게 하던 소설이 이제 남의 이야기에 귀를 열게 한다.



가상의 마을 향주읍 세무사무소에서 “작지만 묵직한, 밀도 높은 기사”(20쪽)를 오려 모으던 기정은 우연히 가까워진 부자 할머니 선열에게 이야기를 가져간다. 만날 때마다 용돈 봉투를 쥐여주는 선열이 향주로 숨어든 사연부터 물음표다. 접합과일을 개발하는 과수원 주인이자 사건 당사자인 박정김은 이름마저 수수께끼다. “본래 캐물으려던 이야기는 빼곡한 나무 사이로 숨어버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고개를 내밀”(104쪽)며 손을 뻗을 때마다 진상은 한 걸음씩 물러난다. 술래를 피해 달아나듯.



이야기를 향한 갈증을 식욕으로 채우던 기정의 생활은 도난 사건이라는 현실에서 판타지로 휩쓸려 들어간다. 초접합과일 ‘두두’를 먹고 사람의 일부를 깨물면 그 마음이 느껴진다는 설정은 기괴하면서도 신비롭다.

도난 사건의 전말은 의외로 시시하지만 향주의 이야기는 제각각 맛있다. 밑동만 남은 자리에 새순이 다시 돋듯 이야기를 모조리 먹어버린 기정에게서 “긴긴 이야기의 첫 장이 마침내 시작되었다.”(240쪽) 각자의 이야기를 따라 마지막 장까지 내달린 뒤 책장을 덮으면, 문득 옆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최여경 선임기자
2026-10-2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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