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유가가 치솟았다. 국제유가 급등은 국내 유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휘발유는 약 30%, 경유는 40% 이상, 서민 난방용 등유는 50% 이상이나 올랐다. 화물차 기사들은 매달 기름값이 100만원 이상 더 든다고 호소했다. 올라가는 등유값을 감당하지 못해 난방을 줄이고 하루 한 끼로 버티는 이웃도 있었다. 고유가는 주유소 가격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생계와 일상을 위협하고 취약계층을 더 어렵게 만든다.
이번 호르무즈 사태에서도 세계 곳곳이 고유가로 신음하고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 미국에서 트랙터와 콤바인을 돌리는 경유값이 사상 최고치를 찍자 아이오와의 공화당 원로 상원의원이 SNS에 대문자로 “경유값이 농민 소득을 죽이고 있다”고 적고 대통령에게 경유 수출을 막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값싼 기름을 공기처럼 누리던 나라의 농심이 이렇게 성난 적이 있었던가.
유럽에서는 기름값이 치솟자 소비자들이 내연기관차를 외면하고 전기차로 몰렸고, 그 과실은 중국산이 챙겼다. 지난 3월 한 달 유럽의 중국산 전기차 판매는 1년 전보다 78% 늘었다. 고유가는 이렇게 생각지 못한 경로로 경제를 흔든다. 유럽에 차를 파는 우리 기업도 이 파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급해진 각국은 지갑을 열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국제에너지기구(IEA) 집계를 인용해 고유가 상황에서 소비자 보호 조치를 시행 중인 나라가 94개국에 이르며, 이 중 연료 보조금을 주는 나라는 38개국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효과는 신통치 않다. 미국 경유값은 전쟁 이후 70% 치솟았고, 유럽에서는 가정용 에너지 요금이 계속 오르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재정 부담 속에 보조금을 줄였다.
같은 기간 한국의 경유값은 어땠을까. 전쟁 직전인 2월 28일 ℓ당 1598원에서 10월 13일 1843원으로 15% 올랐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이 70% 오르는 동안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수입국의 기름값이 덜 오른 건 아이러니다.
비결은 두 가지다. 안정적인 원유 도입, 그리고 3월부터 시행한 최고가격제다. 전쟁이 터지고 열흘 만에 경유값이 300원 이상 뛰자 정부는 정유사 공급가에 상한을 씌웠다. 그 뒤 기름값은 7개월간 등락 속에 현재 국제 제품가 대비 낮은 수준인 1800~2000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국제 경유가가 배럴당 170달러를 오르내리는 와중의 숫자다. 정부는 최고가격제 덕에 9월 물가상승률이 0.6% 포인트 낮아졌다고 본다. IEA 집계상 연료 가격 상한을 운용하는 나라 23개국 중에서도 이만큼 가격을 붙잡아 둔 사례는 흔치 않다.
최고가격제는 평시 제도가 아니다. 시장가격에 손대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정유사의 손실, 재정 부담, 무뎌지는 가격 신호가 그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시장 개입은 좁게, 한시적으로 하라고 권고하는 것도 그래서다. 평시라면 이런 비용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평시가 아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고 전쟁이 길어지는 비상 상황에서 가격을 시장에만 맡기면 그 충격은 경유로 생계를 꾸리는 화물차 기사와 농어민, 장바구니를 든 서민에게 떨어진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처방이 필요하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럽은 가스 저장량이 사상 최저인 채로 겨울을 맞고, G7은 비축유 방출을 논의하고 있다. 비상 상황이 이어지는 한 최고가격제를 거둬선 안 된다. 다른 나라 농민의 분노와 공장의 위기를 보며 우리가 누리는 1800원대 기름값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