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치밀하게… 환상과 고독 설득하는 무대

최여경 기자
수정 2026-10-19 00:55
입력 2026-10-19 00:55
겨울왕국, 얼음 궁전의 재현
특수 ‘얼음 드레스’ 42일 걸려 제작
의상·구조물 조명 비춰 변신 강조
엘리자벳 , 외로운 황궁 묘사
거대한 부채·독수리 조각 등 활용
황후 옷 16벌… 소품 1000개 수작업
지난여름, 서울의 두 대극장이 사흘 간격으로 무대를 열었다.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뮤지컬 ‘겨울왕국’이 한국 초연의 막을 올렸고, 용산구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는 ‘엘리자벳’이 여섯 번째 시즌을 시작했다. 두 공연을 본 관객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같다. “무대가 눈부시게 화려하다”는 감탄이다. 같은 수식어로 묶였지만, 두 무대의 목적은 정반대다. ‘겨울왕국’이 환상의 세계를 현실화하는 데 집중했다면, ‘엘리자벳’은 유럽 황실 뒤에 숨은 위압감을 드러낸다.에스앤코 제공
‘겨울왕국’의 과제는 ‘애니메이션으로 친숙한 얼음 궁전을 어떻게 실물로 지을 것인가’였다. 관객의 기억 속에 이미 완벽하게 각인된 궁전을 65t의 철골과 천으로 재건하기 위해, 제작진은 ‘한꺼번에 터뜨리기’를 택했다.
1막을 닫는 ‘렛 잇 고’(Let It Go)가 그 절정이다. 엘사가 손을 뻗을 때마다 무대 바닥과 벽면에 조명과 영상 효과가 번지고, 눈 결정체 크리스털을 단 구조물이 동시에 솟아올라 거대한 얼음 궁전을 이룬다.
노래가 정점에 이르는 찰나 대관식 의상이 벗겨지며 얼음 드레스가 드러나는 장면은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터라 또 다른 효과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찾은 답은 1만개가 넘는 비즈와 스톤으로 장식한 드레스에 강한 조명을 몰아주는 방식이었다. 어두운 의상이 하늘색으로 바뀌는 순간, 조명을 받아 빛을 사방으로 반사하는 드레스는 그 자체로 환상의 실현이 된다.
브로드웨이 초연부터 참여한 리사 던 케이브 프로덕션 수퍼바이저는 “시각적으로 완벽한 마법”이라면서 “순식간에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고 무대가 완전히 변하는 순간이 있다”고 짚었다.
환상을 설득하려면 재료가 먼저 실재해야 한다. 앙상블 의상은 노르웨이 전통 복식 부나드를 바탕으로 삼았고, 원단은 12개국에서 들여왔다. 얼음 드레스는 한 벌을 완성하는 데 42일이 걸렸다. 135분을 달리는 이 작품이 관객이 탄성을 지르는 몇 초에 막대한 자원을 집중한 이유는 그 짧은 순간이 전체의 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엘리자벳’은 반대편에 선다. 실베스터 르베이의 음악과 미하엘 쿤체의 극본으로 199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이 작품은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1837~1898)의 생애를 다룬다. 여기서 황궁은 보여줄 대상이 아니라 벗어나야 할 대상이다.
서숙진 무대디자이너는 “작품을 관통하는 엘리자베트의 고독과 고통을 무대에서 시각화하고 싶었다”면서 “궁전에 관한 모든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중심 모티브는 부채다. 초반의 장식이 후반으로 갈수록 늙어가는 얼굴을 가리는 도구로 바뀐다는 데 착안해, 부채를 확대한 거대한 아치를 무대 전면에 세웠다.
높이 6m의 독수리 조각상은 권력의 좌표를 그린다. 그는 “독수리의 시선에 따라 권력의 이동을 표현하려 했다”고 덧붙였다. 두 기둥이 합쳐지면 왕가의 상징인 쌍두독수리가 되고, 그 아래 선 엘리자베트는 시선에 갇혀 압박감에 짓눌린다.
단차를 끌어올린 회전무대는 배우에게 부담스러운 동선이다. 그러나 아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던 어머니를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는 절묘한 장치다. 걷기조차 힘든 무대가 그의 어려운 삶을 대변한다.
무대 이면에 노동의 숫자가 쌓였다. 한정임 의상디자이너는 ‘죽음과 삶’을 축으로 전체를 다시 짜 엘리자베트에게만 16벌을 입혔고, 깃털 100개를 엮은 ‘죽음의 천사’ 날개 한 쌍에는 두 달을 쏟아부었다. 액자 조형물은 작화팀 10명이 석 달을 매달려 완성했다. 그 밖의 소품 1000여개도 손으로 만들어졌다.
철골과 스톤, 치밀한 설계와 반복 노동으로 지어 올린 장면들에서 화려함은 과시가 아니라 설득의 방식인 셈이다.
‘엘리자벳’은 11월 15일까지, ‘겨울왕국’은 2027년 3월 1일까지 공연한 뒤 부산 드림씨어터로 옮긴다.
최여경 선임기자
2026-10-1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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