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6알씩 꿀꺽… 가난할수록 ‘묵직한 약봉지’

이현정 기자
수정 2026-10-16 01:43
입력 2026-10-16 01:00
빈곤 노인 10명 중 7명, 5종 이상 복용
일반 노인 두 배 수준… 부작용 우려
처방 점검 ‘약물 관리 주치의제’ 필요
서울의 한 쪽방촌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박모(72)씨의 방 한구석에는 약봉지가 수북이 쌓인 바구니가 놓여 있다. 혈압약, 당뇨약, 관절염약, 위장약, 수면제까지 매일 먹는 알약만 16종에 이른다. 박씨는 “여기가 쑤시면 이 병원, 저기가 아프면 저 병원에 가다 보니 약이 자꾸 늘었다”며 “아침마다 한 주먹씩 입에 털어 넣는 게 일상”이라고 말했다.
노년층의 약물 복용에도 소득에 따른 격차가 나타났다. 가난한 노인일수록 여러 약을 오랜 기간 복용해 부작용에 노출될 위험도 크지만 이를 걸러줄 의료 안전망은 턱없이 부족하다.
1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0종 이상의 약을 장기간 복용한 사람은 143만 8981명이다. 이 가운데 65세 이상이 82.1%를 차지했다. 2021~2025년 5년 연속 10종 이상을 복용한 고령자 26만여명의 지난해 평균 처방약은 14.3종에 달했다.
약물 다량 복용은 저소득층에서 두드러졌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과 분당서울대병원 연구진이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66세 노인 340만명을 분석한 결과 2021년 기준 한 해 90일 이상 5종 이상의 약을 처방받은 비율은 의료급여 수급자가 69.7%로 건강보험 가입자(34.4%)의 두 배 수준이었다. 연구진은 의료급여 수급자(1종)의 진료비가 1000~2000원, 약값이 처방전 하나당 500원에 그쳐 병원 문턱이 낮다는 점을 요인으로 꼽았다.
문제는 약 종류가 늘어날수록 약물 간 상호작용에 따른 부작용 위험도 커진다는 점이다. 실시간으로 중복 처방을 걸러내는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UR)가 있지만 별도의 수가가 없다 보니 적지 않은 개원의들이 확인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꺼두기 일쑤다. 일부 의료 현장에서는 약 때문에 소화불량이 생기면 소화제를, 어지럼증이 생기면 어지럼증 약을 처방하며 부작용을 약으로 덮는다. 이렇게 ‘약이 약을 부르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중복·과다 처방을 사후에 점검하는 사업도 있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지난해 건강보험공단의 관리서비스를 받은 사람은 10종 이상 복용자의 0.8%에 불과했다.
정기석 용산구 보건소장(전 건보공단 이사장)은 “구청이 방문간호사를 보내 겹치는 약은 드시지 말라고 안내해도 정작 약을 처방한 의사에게는 그 의견이 전달되지 않고 처방권이 없는 약사가 직접 나서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흩어진 처방을 모아 점검할 ‘약물 관리 주치의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 소장은 “환자가 여러 병원에서 약을 타 오더라도 누군가 한 명은 그 약을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며 “불필요한 약을 줄여 주는 의사에게 복용 지도료 같은 수가를 인정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2026-10-16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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