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무대, 묵직한 언어의 울림…눈처럼 내려와 마음 깊이 쌓이네

최여경 기자
수정 2026-10-12 01:38
입력 2026-10-11 19:38
눈발이 날리는 벌판에 검은 통나무 수천 그루가
묘비처럼 박혀 있고, 그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든다.
한강 원작 낭독극 ‘새’ 서울 초연4·3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 각색
佛·韓배우가 불어·한국어로 낭독
아비뇽 초연서 한강이 읽은 대목
이번에는 학생의 목소리로 전달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눈발이 날리는 벌판에 검은 통나무 수천 그루가 묘비처럼 박혀 있고, 그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든다.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주인공 경하가 꾸는 꿈으로 시작한다. 그런 경하에게 친구 인선이 지금 와 줄 수 있느냐는 짧은 메시지를 보낸다. 입원한 인선은 제주 집에 홀로 남은 새를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낭독극 ‘새’에서 이 여정을 감싸는 것은 눈이다.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명예의 안뜰에서는 성벽의 여러 창 가운데 하나에서만 스노볼처럼 눈이 내렸고, 10일 서울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는 무대 한쪽에 직접 눈을 뿌렸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프랑스 연출가 줄리 들리케는 이날 밤 공연 뒤 기자들과 만나 “창 하나에 내리는 작은 눈으로 거대한 무대에 선 두 여성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서울에서는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떨어지는 눈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사라져 가는 느낌을 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새’는 제주 4·3을 다룬 이 소설의 1부를 풀어낸 낭독극이다.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경하를 맡아 프랑스어로, 이혜영이 인선을 맡아 한국어로 읽는다. 제80회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했고, 제26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으로 10~11일 서울 관객을 만났다.
배경을 만드는 하얀 스크린과 바닥, 눈과 한글·프랑스어·영어 자막 이외에는 별다른 장치가 없는 무대 위에 나란히 선 두 배우는 대사와 시선, 몸짓만으로 현실감 있는 110분을 만들어냈다. 새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에서는 어깨에 앉은 새를 토닥이는 듯,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맞는 듯 연기했다.
2000명 가까운 관객이 모인 야외 안뜰에서 실내 극장으로 옮겨온 극은 더 몰입감이 높아졌고, 결말에도 변화를 줬다. 아비뇽에서는 한강 작가가 깜짝 등장해 읽은 마지막 대목은 이번 공연에선 황주현 학생이 이어받았다.
이혜영은 낭독극과 연극의 차이를 묻자 “이런 극은 처음 해 봤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관객 앞에서 그날의 현장에 맞춰 새로운 기분으로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낭독극도 연극과 다르지 않다”면서 “역시 연극의 완성은 관객이다. 모국어로 듣는 관객이 대사에 더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함께 자리한 위페르는 ‘언어’를 화두로 꺼냈다. 그는 “문학의 언어와 연극의 언어는 다르다. 한강 작가의 문장을 목소리로 되살려야 했기에 언어 문제에 더 집중해 준비했다”고 부연했다. 야외와 실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아비뇽에서는 바람을 비롯한 자연이 함께했지만 실내에서는 침묵과 서로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면서 “아비뇽의 작업이 이성적이었다면 서울에서는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교감이 더 부각된 것 같다”고 돌아봤다.
들리케 연출은 “학살 이야기에 앞서 두 주인공의 우정과 서로의 연약함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각색 방향을 밝혔다. 그는 또 다른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1985년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지난해 무대화한 경험을 꺼내면서 “역사가 다루지 못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문학이 언어로써 접근하는가에 대해 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작업을 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낭독 장면에 대해 그는 “이혜영 배우에게서 4·3이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프랑스나 유럽에서도 몇 세대가 지나야 알게 되는 역사가 있다. 이 역사(제주4·3)을 알았으면 하는 젊은 세대에게 맡겼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문학과 예술은 산 사람과 떠난 영혼 사이의 대화를 이어 간다”고 강조했다.
위페르도 “2차 세계대전 때 침묵 속에 묻힌 일들을 최근 영화감독들이 하나둘 꺼내고 있다”면서 “한강 작가가 다룬 역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라고 거들었다.
이혜영은 아비뇽 공연 뒤 한강의 작품을 두루 찾아 읽었다고 했다. 그는 “역사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는 숱하게 봐 왔지만 이 작품처럼 아름다운 것이 있었나 싶었다”면서 “한강 작가가 어떤 작가들을 좋아했을지까지 따라가 봤다”고 전했다.
최여경 선임기자
2026-10-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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