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풀꽃 편지] 오늘은 좋은 날

수정 2026-10-02 01:01
입력 2026-10-02 00:09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많이 하
고 사람을 많이 사귀자는 독만
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오늘
이뤘으니 얼마나 좋은 날인가”

강연 가기 싫다. 이렇게 비까지 내리는 날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미 한 약속인 걸 어쩌랴. 생각해 보면 어디서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고 나를 불러 주는 일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닌가.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장 가운데 ‘독만권서(讀萬券書) 행만리로(行萬里路) 교만인우(交萬人友)’란 것이 있다. 될수록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많이 하고 사람을 많이 사귀자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생애의 전반부 학교 선생으로 살면서 조그만 세상을 살아 독만권서와 행만리로와 교만인우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교직에서 물러나 많은 곳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고 많은 사람,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삶을 아주 오래 살았다. 그래서 내게 부족했던 독만권서와 행만리로와 교만인우가 어느 정도는 충족된 셈이다. 그러하다. 오늘 내가 부산여자고등학교로 KTX를 타고 가는 것은 그 독만권서와 행만리로와 교만인우를 실천하러 가는 길이다. 불평할 일이 아니다.


부산역에 도착하자 그 학교의 교감이란 분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학교에 도착하여 교장실로 인사 가기 전에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 쓰여진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가 자라기를 오래 하면 반드시 산중에 우뚝하며/ 물이 흐르기를 오래 하면 반드시 바다에 도달한다.’

서예 작품으로 처음 보는 문장인데 참 좋다. 이런 좋은 문장을 보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대뜸 핸드폰 카메라로 그 문장을 담았다. 알고 보니 그 문장은 서예가로 활동하는 부산여고 졸업생의 작품이라 한다. 그뿐 아니다. 복도에 게시된 그림도 모두 선배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남다른 학교다 싶은 마음으로 교장실에 들어섰을 때 미남형의 교장이 익숙한 솜씨로 녹차 한 잔을 우려 내 앞에 내놓았다. 다시금 그것이 또 특별했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보니 교장 책상 뒤로 한문 서예 작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불양수’(海不讓水). 좋은 문장이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거부하지 않는다.’ 어떤 경찰서에 갔을 때 만난 글은 ‘불치하문’(不恥下問)이었고 어떤 법원장 방에서 만난 글은 ‘안횡비직’(眼橫鼻直)이었다. 모두가 참 좋은 문장들이다. 마땅히 이러한 글을 만났을 때는 새롭게 묻고 새롭게 기록하고 새롭게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이다.

나는 벌써 기분이 좋아져서 강연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첫눈에도 학생들의 태도는 다른 곳에서 보던 학생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맑고도 깊은 갈망의 눈동자. 정숙한 앉음새와 진지한 태도. 아 이렇게 어여쁜 청춘들을 내가 어디 가서 만나랴!

나는 준비한 강연 주제를 내려놓고 즉흥으로 강연했다. ‘독만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부터 시작해 김태길 교수가 1985년 ‘한국의 젊은이에게 고한다’는 세 가지 말씀을 전했다. ‘첫째, 어느 분야든지 달인이 되자. 둘째, 경쟁 상대를 국내에서 찾지 말고 세계에서 찾자. 셋째, 사익보다는 공익에 힘쓰자.’

더하여 나는 독일 시인 괴테의 말을 전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네가 지금 읽고 있는 책과 네가 만나는 사람과 네가 자주 가는 곳이 너를 말해준다.’ 내친김에 나는 공자님의 ‘지자(知者)는 불여호자(不如好者)요 호자(好者)는 불여낙자(不如樂者)니라’까지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마치 건강한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같이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어찌 학생들이 이처럼 의젓하고 속내 깊고 맑을까?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내 시집을 사서 읽고 그것을 시화로 만들어 보고 필사도 하면서 속마음을 키운 까닭이다.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도서실 입구에 나의 시로 만든 학생들의 시화 작품이 수두룩하게 붙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러길래 학생들의 눈빛이 그토록 맑고 듣는 태도가 좋았던 것이다. 다시 한번 도서실 벽을 훑어볼 때 거기에 또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마음이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박경리, ‘마음’) 내 마음속에서 또다시 느낌의 물결이 흘렀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도 나는 이렇게 ‘독만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를 이룬 셈이다. 이 얼마나 좋은 날인가!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2026-10-0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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