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디 봐라, 끝까지… 언어와 형식의 유쾌한 줄다리기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수정 2026-10-02 00:08
입력 2026-10-02 00:08

단디 봐라/최재원 지음/문학과지성사/148쪽/1만 3000원

엎치락뒤치락 자아내는 리듬감
소리 내어 읽고 싶은 낭독의 장르
발랄한 문체에 담은 흥미로운 시
최재원 시인


‘시쓰기’는 어쩌면 언어와 형식 사이에 벌어지는 유쾌한 줄다리기를 가만히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언어가 형식에 맞춰졌다가, 다시 형식이 언어에 굴복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리듬이 탄생할 때, 우리는 시가 본디 낭독하는 장르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시인 최재원(38)의 새 시집 ‘단디 봐라’는 제목에서부터 독자에게 강렬한 당부의 말을 건네며 시작한다. ‘단디’ 보라고. 허투루 보지 말라고. 끝의 끝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눈 감지 말라고.


“뒷모습이 네 뒷모습이/ 얼굴이 될 때까지 그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사라지고 나서도 널 바라보았다/ 여기 여섯 개의 진흙덩이들/ 나처럼 널 알지 못해 그들은/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 모래로 부서지는 날/ 다시금 다시금 다시금 다시금, 다듬던// 저문 빛이 닿지 않는 곳에도 바람은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훔쳐주고/ 나는 조금,/ 단단해지고”(‘첫 공’ 전문)



어느 날 사랑이 과거의 일이 됐을 때, 사랑했던 이는 뒤돌아서 간다. 뒷모습에는 얼굴이 없다. 뒷모습에서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화자의 기억이고 상상이다. 그러나 떠올랐던 것은 이내 사라지기 마련이다. 화자는 심지어 사라지고 나서도 너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사라진 것’을 과연 ‘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라진 너’를 바라보는 일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것은 지독한 그리움이거나, 아직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얀 장미는 곱게 마르고/ 붉은 장미는 짙게 지는데/ 발걸음 아래 젖은 목련은/ 왜 향기를 멈추지 않는가// 님이 엮어준 반지 이 밤도/ 열 손가락 사위고 달만 차는데/ 눈길 한 자락 달빛에 남기잖고/ 어디로 가버렸소 당신은”(‘봄비’ 부분)

소리를 내어 읽고 싶어지는, 소리를 내어 읽었을 때 더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다. 시조의 율격을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복원한 듯한 시인의 형식적 시도가 반갑다. 이외에도 시집에는 말의 반복 등을 통해 리듬감을 자아내는 작품이 여럿 있다. 거의 모든 행이 ‘고’로 끝나는 시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그렇다. 원래 있는 단어를 장난스럽게 뒤튼 시의 제목도 재밌다. 시 ‘숨 밖 옥 쥘’(숨바꼭질), ‘감가삼각’(감가상각) 등이 대표적이다. 짧은 호흡으로 시를 정의하고 있는 연작 ‘시’는 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독자에게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가닿는다. 아래 인용하는 네 작품의 제목은 모두 ‘시’다.

“오래 우리면 진액이 나와 쓴맛이 나니 먼저 건져내어 주세요”

“아까우니 체에 밭쳐 꾸욱 눌러 짜주세요”

“끓고 있을 때는/ 눈 씻고 본대도/ 무엇이 끓는지/ 보이지 않을 것”

“뒤에 하얗게 묻은 것까지/ 날름날름 핥고도 모자라/ 홈 사이사이 굳은 것조차/ 아까워라 혀를 바짝 세운다”

시인의 이력이 제법 독특하다. 경남 거제시에서 태어나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명문 프린스턴대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했다. 2021년 김수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백합의 지옥’에 이어 이번 시집이 세 번째다. 무거운 내용을 재치 있고 발랄한 문체에 담아내는 면모가 흥미롭다. 삶과 죽음의 동그란 순환을 표현한 시 ‘알’이 그렇다.

“굴려도 굴려지지 않으면/ 난 아직 살아 있는 거야./ 안녕!// 굴려도 끄덕끄덕하다 멈춰버리면/ 난 아직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거야./ 안녕!// 굴렀는데 잘 굴러가잖아?/ 돌렸는데 잘 돌아가잖아?/ 난 이미 죽은 거야./ 안녕.// 안녕히.”(‘알’ 전문)

오경진 기자
2026-10-02 18면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