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산 라디오에 도전한 구인회…‘금성사’, 70년 뒤 피지컬 AI 만드는 ‘LG’로[창업주의 비밀노트]

송수연 기자
수정 2026-09-28 09:02
입력 2026-09-28 09:02
최초 국산 라디오·에어컨·세탁기 생산…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 연 ‘개척자’
“사람의 생활을 바꾸는 제품”에 집중…백색가전 1등 LG전자의 뿌리
피지컬 AI사업에 도전하고 있는 LG, 창업 정신 이어 받아
“비웃지 말라. 언젠가는 모든 집에 (라디오) 한 대씩 있을 거다.”
전쟁 폐허 속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1950년대 말, LG그룹의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우리 기술로 라디오를 만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허황된 꿈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전자제품 자체가 전무했던 시기였죠. 외국산 라디오는 소 한 마리 가격에 육박해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회사 임원들까지 모두 구 회장을 뜯어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구 회장은 일본과 미국으로 100일간 해외 시찰을 다녀와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후 1958년 설립한 회사가 LG그룹의 전신인 금성사(Goldstar)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공업회사였습니다. 금성사는 이듬해인 1959년에 국내 최초로 진공관 라디오 1호 A-501을 출시했습니다. 구 회장은 “사람의 생활을 바꾸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신념처럼 금성사는 냉장고와 TV 등 생활가전을 잇달아 선보이며 이제는 세계 가전 시장을 호령하는 LG전자의 뿌리가 됐습니다.
금성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라디오를 출시한 지 70여년이 지났고 LG는 이제 세계 최대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와 손잡고 피지컬 AI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내년 1분기에 이족보행 휴머노이드를 공개할 예정입니다. 산업 현장을 넘어 집안일을 도와줄 수 있는 가정용 로봇 보급이 목표죠. “사람의 생활을 바꾸는 제품”에 집중하라는 구 회장의 유지가 여전히 이어진 셈입니다.
“사회에 도움되는 일을 찾아야 한다”…협동 조합을 만든 청년
구 회장은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보수적 가정에서 한학을 익혔고, 3년간 지수 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중앙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2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죠.
귀향 후 구 회장은 마을에서 일본인들의 텃세에 못 이겨 문을 닫는 가게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본인들이 생필품을 독점해 큰돈을 벌고 있었던 겁니다. 구 회장은 상생할 방법을 찾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지수협동조합’을 조직했습니다. 석유, 비누, 광목, 비단 등 일용 잡화를 공동 구매해 일본인보다 싼값으로 나눠 주자 큰 인기를 끌었고, 마을 사람들의 형편들도 더 나아졌습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 기업만이 영속적으로 대성할 수 있다”는 구 회장의 훗날 경영 철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대목입니다.
구 회장은 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선출된 후 포목의 유통 경로와 마케팅 기법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협동조합에 몸담은 지 5년이 되던 1931년 7월에 구 회장은 포목점인 ‘구인회상점’을 열었습니다. 값을 깎아 주지 않는 대신 포목의 자를 속이지 않아 신용을 쌓아 갔습니다. 그러던 중 1936년 대홍수로 인해 구 회장은 재산의 대부분을 잃게 됩니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았습니다. 대홍수 뒤에는 풍년이 들어 혼례가 많아지고 포목을 찾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죠. 쌀 200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금 1만원을 빌려 포목을 미리 사들였습니다. 구 회장의 예상대로 홍수 뒤 풍년으로 사람들은 혼례를 위해 비단과 명주를 사들였습니다. 구인회포목상점은 전례 없이 큰 매출을 올리게 됩니다. 구 회장은 구인회포목상점의 상호를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변경하고, 사업의 규모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구 회장은 일제 말 삼엄했던 감시망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충칭 임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942년 여름, 변장을 하고 찾아온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에게 1만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죠.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 기업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복리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백년대계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겁니다.
락희화학공업사, 럭키크림 판매 성공…플라스틱 공장 설립으로 이어져
구 회장이 근대적 기업가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8·15 해방 이후입니다. 해방의 감격과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1945년 9월 부산으로 이주했습니다. 그해 11월에 무역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고, 이듬해 2월부터 화장품 판매에 나섰습니다. 1947년 1월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럭키표 크림을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죠.
크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일제나 미제보다 낮은 가격에 좋은 품질을 인정받은 여성 화장품 ‘럭키크림’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순간 크림통 뚜껑이 파손돼 반환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한 거죠. 구 회장은 ‘파손되지 않는 뚜껑을 만들 수 없을까’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때 플라스틱 뚜껑이 좋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구 회장은 일본에서 6권에 달하는 플라스틱 관련 책을 입수한 뒤 사업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범일동에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하고, 크림통 뚜껑뿐만 아니라 빗, 비눗갑, 칫솔, 담뱃갑 등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1955년 3월에는 럭키표 치약도 생산했습니다. 럭키치약은 그 후 오랫동안 국내 시장을 독점했고, 치약 제조와 판매의 성공으로 LG그룹의 기반을 한층 더 굳게 다졌습니다.
하지만 1957년 플라스틱 공업이 군소업체의 도전으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구 회장은 전자 부분으로 사업을 전환하면서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금성사, 국내 최초 전자공업회사…라디오·에어컨·세탁기 국내 생산 성공
우리나라 최초 전자공업회사인 금성사가 설립된 것은 1958년입니다. 구 회장은 우연히 접한 하이파이 전축에 이끌려 라디오를 제작하는 일에 뛰어들고자 했습니다. 당시 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은 기술 수준이 낮으면 외국에서 배워 오면 된다고 직원들을 설득시켰습니다. 플라스틱 가공 기술이 있으니 라디오 케이스를 비롯해 전자 부품 중 많은 부분을 우리 기술로 생산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1958년 11월 금성사는 진공관 라디오 1호 A-501을 출시했습니다. 부품 중 60%를 국산화한 제품이었죠. 그러나 제품 출시가 바로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외국제에 대한 선호품, 밀수품 등의 영향으로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금성사에서 개발해서 생산한 선풍기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그는 “‘매화는 모진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향기를 뿜는다는 교훈처럼 고생 안 하고 얻어지는 보물이 어디 있겠냐”며 “우리는 전자공업이라는 길 없는 밀림 속을 헤쳐나가는 ‘개척자’다. 가까운 시일 언젠가는 고생한 만큼 보람도 얻게 될 테니 그때까지 모두들 마음 합치고 힘을 모아달라”고 직원들을 다독였습니다.
그의 말처럼 금성사는 5·16 쿠데타 이후 밀수품 단속이 강화되면서 기회를 얻게 됩니다. 특히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자 라디오가 동날 정도로 많이 팔렸습니다. 우리나라 라디오 수신기 대수는 1961년 약 53만대에서 1974년 556만대로 10배 이상 많아졌습니다. 1961년 12월 KBS 텔레비전이 개국하자 TV 수상기 제작에도 힘을 기울였죠. 1966년 8월 금성사는 국내 최초로 흑백 TV(19인치)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옛 어른들이 TV 하면 ‘금성’ 혹은 ‘골드스타’를 떠올리는 것도 이때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LG가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락희화학(Lucky)과 금성사(GoldStar)는 1983년 ‘럭키금성(Lucky GoldStar)’이라는 통합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글로벌화를 추진한 1995년 ‘Lucky GoldStar’의 앞글자를 딴 ‘LG’로 브랜드를 통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이외 금성사는 1968년 국내 최초 국산 에어컨, 1969년 국내 최초 국산 세탁기를 잇달아 선보이며 생활가전 산업의 역사를 썼습니다. 이후 냉장고·TV 등으로 제품군을 넓히며 LG전자를 대표하는 ‘백색가전’ 경쟁력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구 회장은 전자 산업에 이어 1966년 호남정유를 설립하며 정유사업에도 뛰어들었고, 이후 금성통신·금성전선·락희개발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습니다. 전자·정유·통신·건설 등 신산업 개척에 평생을 바친 구 회장은 1969년 말에 62세로 별세했습니다.
구 회장의 ‘개척 정신’…LG의 ‘AI 그룹’ 도전으로 이어져
구 회장은 사람 중심 경영인 ‘인화(人和)’의 경영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연 ‘개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현재의 LG의 경영 철학으로 이어집니다. LG는 이제 가전을 넘어 AI를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사업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엔비디아와 협력해 로봇의 학습·시뮬레이션부터 실제 현장 적용까지 아우르는 피지컬 AI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룹 차원에서는 AI 공장을 구축해 로봇뿐 아니라 자율주행·데이터센터 등으로 AI 사업을 확대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산업에 도전 중입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첫 라디오를 우리나라에 안겼던 구 회장의 ‘개척 정신’이 이제 AI와 로봇이라는 첨단 영역에서 다시 이어질지가 관건입니다. 금성사의 ‘도전 정신’이 LG의 미래 개척에서도 열쇠일 테니 말입니다.
송수연 기자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