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길목 지켰던 그림 같은 성곽, 넓은 초록 마당… 마음도 초록초록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서동철 기자
수정 2026-09-24 00:11
입력 2026-09-23 23:20
중부 군사 요충지 ‘청주 상당산성’
잘 정비된 성곽길 가벼운 등산에 딱숙영지였던 성 내부 카페·맛집 밀집
왜란 거치며 도성 방어 핵심 기지로
이인좌의 난 때 관군·반란군 공방전상당산성은 충북 청주시 도심의 동쪽에 있다. 시내 중심부의 청주읍성 터 청주중앙공원에서 자동차로 20~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길이 4.2㎞의 상당산성은 잘 정비되어 있는 성곽길을 따라 가벼운 등산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문루를 중심으로 다양한 갈래길이 있으니 그날의 컨디션에 맞는 코스를 골라 걸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특히 남문에서 서문으로 오르다 눈앞에 펼쳐지는 청주 시내의 모습은 장관이다. 과거에는 군사의 숙영지였을 산성 내부에는 제법 유명세를 떨치는 카페며 음식점이 밀집해 있다. 상당산성은 반나절 여유만 있어도 문화적 여유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성곽 안팎 여러 곳에 마련된 주차장도 휴일이면 비좁을 지경이다. 맛집촌이 기점이자 종점인 862번 시내버스도 손님이 많았다. 국립청주박물관을 거쳐 도심으로 진입한 다음 충북도청의 복합문화공간 ‘그림책 정원 1937’과 청주시립미술관, 청주체육관, 청주 예술의전당을 거쳐 산성으로 돌아오는 노선이다. 청주의 문화를 돌아보는 데 유용할 것 같다.
청주 시내에서 상당산성으로 가려면 산성로를 타야 한다. 중부고속도로 오창분기점으로 나서도 다르지 않다. 512번 지방도의 일부다. 산성교차로에서 성내로로 갈아탄 뒤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상당산성 관리사무소와 널찍한 주차장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언덕 위에 남문인 공남문과 동서로 가지런히 이어진 성곽이 보인다.
공남문으로 오르는 초입에 ‘상당산성과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상당산성이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머무는 본부는 아니었다. 충청병영은 청주읍성에 있었다. 상당산성은 충청병영의 2인자인 병마우후가 지휘하는 부대가 주둔하며 청주읍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청주는 동래와 한양을 잇는 거점의 하나였다. 남해안으로 침입해 도성으로 북상하는 외적을 중도에 격퇴하는 것이 조선시대 상당산성 주둔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상당산은 한남금북정맥을 이루는 봉우리의 하나다.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과 한남정맥 및 금북정맥을 이어 주는 산줄기다.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왕봉에서 갈라져 나와 경기도 안성 칠장산으로 북상하면서 충북도를 동서로 가른다. 자연스럽게 상당산을 비롯한 일대 산줄기는 금강 수계와 남한강 수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됐다.
청주 시가지는 동쪽에서 북상하는 한남금북정맥과 서쪽에서 남하하는 금북정맥 사이의 분지에 자리잡았다. 서쪽으로는 음성 부용산에서 발원한 미호강이 남쪽으로 흘러 세종시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청주읍성을 비롯한 시가지 중심부는 무심천이 북쪽으로 흘러 미호강에 합류하는 평야지대에 형성됐다. 미호강변 소로리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출토되기도 했다. 아주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갖춘 고장이었다.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
상당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변 지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랫동안 백제와 신라의 접경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청주목의 군사며 주민이 유사시 들어가 적이 물러갈 때까지 방어하는 입보산성(入保山城)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상당산성이 한반도 중부의 핵심 군사 거점으로 떠오른 것은 조선시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몰려가면서 도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중요성이 극대화됐다.
조선시대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충주를 지나 새재를 넘은 다음 문경~상주~대구~밀양~동래로 이어졌다. 그런데 왜란 발발 직후 구로다 나가마사의 왜군 제3번대는 동래에서 성주~지례~김산(김천)~추풍령~영동~청주를 거쳐 도성으로 북상했다. 조령을 넘어 충주에서 신립 장군의 조선관군에 승리를 거둔 왜군 선발대와는 다른 코스였다. 1592년 6월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은 8월에 조헌 의병과 영규 의승군·관군의 연합군이 탈환했다. 이후 조정에선 청주를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핵심 군사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한다.
1595년 3월 18일자 선조실록에는 영의정 유성룡이 전쟁 재발에 대비한 방어책을 건의한 내용이 실려 있다. 서애 유성룡은 ‘만일 좌·우도의 왜적이 두 갈래로 나뉘어 우리 군사를 압박하면서 중로를 따라 뚫고 나온다면 며칠이 안 되어 영(嶺) 밑에 다다를 것’이라며 조령, 죽령, 추풍령의 대비 태세를 언급한다. 서애는 특히 ‘청주는 바로 추풍, 황간, 영동으로 이어지는 길로 병사(兵使)가 주둔해야 하는데 원균이 부임했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급하게 원균을 재촉해 청주 지역의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앞서 조정은 1594년 12월 1일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을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했다.
●선조 때 원균이 축성… 군역 폐단 거론도
1596년 5월 7일자 선조실록에는 ‘병사 원균이 상당산성을 쌓을 때 고을 형편을 가리지 않고 200∼300명씩 내도록 해서 부역을 독촉한다. 백성이 원망하고 배반한다면 성을 아무리 굳게 쌓았더라도 누구와 함께 지키겠느냐’는 내용도 보인다. 군역의 폐단을 거론한 것이지만 병사의 지휘로 상당산성 축성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듬해 조정에서 원균의 군사적 역량을 논하는 과정에서도 상당산성이 거론됐다. 서애는 “대체로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있었다. 상당산성을 쌓을 때 흙집에 살면서 직접 독려해 축성했다”고 원균의 노고를 치하했다. 하지만 상당산성은 곧 폭우에 무너져 내렸다.
해미에 있던 충청병영을 청주나 충주로 옮겨야 한다는 논의도 본격화한다. 1595년 9월 3일 비변사는 ‘호남과 영남 사이는 적이 왕래하는 요충이므로 충청병사가 연해 지역에 물러나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고는 “청주와 충주 사이를 군사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우두머리에게 책임지워야 한다”면서 ‘이미 병사 원균이 머물고 있다’는 대목이 보인다. 충청병영이 해미에 있었음에도 충청병사는 청주에 상주하며 방어 태세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앞서 충청병영은 지금의 예산 덕산인 이산에서 1414~1421년 서산 해미로 옮겨졌다. 천수만 초입에 충청수영이 있었음에도 멀지 않은 곳에 충청병영을 다시 둔 것은 왜구의 출몰이 그만큼 잦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고 내륙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높아짐에 따라 충청병영은 1651년 청주로 이전한다. 충청병사는 청주읍성의 병영에서 지휘하고 우후는 주력군사를 이끌고 상당산성에 주둔하는 체제였다.
상당산성에는 우후 휘하의 군관 30명과 250명 남짓한 수첩군관(守堞軍官)이 상주하고 있었다. 수첩군관이란 성곽을 방어하는 데 전문성을 가진 직업 군인을 뜻한다. 전시 동원 체계의 상당산성은 승군을 포함해 3500명 남짓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병영은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결합한 독특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청주에 충청병영이 자리잡으며 5진영 체제도 가동됐다. 청주가 중영, 홍주(홍성)가 전영, 공주가 우영, 해미가 좌영, 충주가 후영이었다. 충청도의 새로운 방위체제는 한양의 방어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컸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주 중영과 충주 후영은 남한산성, 공주 우영과 홍주 전영은 강화도에 예속시켜 도성을 보호하도록 했다.
●정작 외적 방어에 쓰인 적은 없어
임진왜란의 와중에 쌓았다가 일부 무너진 상당산성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영조시대다. 1716년 숙종이 성곽 공사를 시작해 1731년까지 동문과 서문, 남쪽 성벽을 개수했고 1731년에는 남문 문루를 세웠다. 1744년 영휴가 지은 ‘상당산성고금사적기’는 산성의 규모와 시설을 기록하고 있으니 개축은 그 이전에 마무리됐을 것이다.
오랜 시간 애써 쌓고 군사체제를 정비한 상당산성이지만 정작 외적 방어에 쓰인 적은 없다. 이인좌의 난 당시 관군과 반란군의 공방전이 벌어졌을 뿐이다. 1728년(영조 4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일으킨 반란이 이인좌의 난이다. 반란군은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장악한 다음 도성을 향해 북상했다. 하지만 반란군 주력이 안성 죽산에서 관군에 패하면서 이인좌의 난은 진압됐다. 상당산성의 사례는 국가적 공력이 투입됐지만 외적 방어 대신 이괄의 난 당시 성곽 밖에서 한 차례 교전이 있었을 뿐인 한양도성을 떠올리게 한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2026-09-24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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