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시간 일해도 밥값 못벌어” 고유가에 심해지는 ‘에너지 양극화’

김지예 기자
수정 2026-09-26 08:00
입력 2026-09-26 08:00
연료 지출 큰 개도국 타격 심각
비축유 방출도 선진국이 유리
동남아·중남미 시민 반발 거세
중동 전쟁 이후 국제 유가가 폭등하면서 세계 에너지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연료·식품 지출 비중이 높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유가 인상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발생했다. 이에 개도국들이 지역 단위의 에너지 공유나 공동 지원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6일 뉴욕타임스(NYT),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중동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 최근 잇따라 파업을 벌였다. 중동 원유 의존도가 특히 높은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반발이 확산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에선 지난 14일 연료 부족에 따른 휘발유 배급제 도입에 반대해 택시 기사들이 지역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자바섬의 족야카르타에서도 연료 가격에 항의하는 시위에 정부 지지 단체들이 시위를 해산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정부는 전쟁 때문에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지만, 국민들은 인상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차량 공유 서비스 기사들이 유류비 상승으로 인한 낮은 임금에 항의하기 위해 운행 거부에 나섰다. 필리핀 대중교통 운송단체 마니벨라 소속 근로자들은 정부 보조금 지원과 유류세 폐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필리핀 버스 운전사와 소유주 7만명으로 구성된 단체의 지도자 모데스토 플로란다는 “하루 15~18시간 일해도 한 끼 식사비 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과테말라에서는 트럭 운전사 단체 등 시위대가 각지 고속도로를 봉쇄했다. 석유 사용량의 90% 이상을 주로 중동에서 수입하는 방글라데시도 천연가스가 부족해 전기 생산이 줄면서 배급제가 시행되고 있다. 국가 경제의 핵심 동력인 의류 공장들은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배럴당 국제유가는 미국의 이란 공습이 있었던 지난 2월 28일(현지시간) 직전까지 서부텍사스 원유(WTI) 선물이 60달러대 중반, 두바이 현물과 브렌트 선물은 70달러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개전 이후 유가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중동 정세가 악화한 지난 9일 이후 100달러를 웃돌았다.
세계은행은 지난 4월 “에너지 가격이 24% 급등하면서 개도국의 인플레이션이 심화하고 경제 성장률이 둔화한다”고 경고했다. 특히 가계 소득 대부분을 연료와 식량에 쓰는 빈곤층의 타격이 크다. 세계은행 그룹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인더밋 길은 “먼저 에너지 가격 상승, 그 다음 식량 가격 상승, 마지막으로 인플레이션 상승을 초래한다”며 “금리를 올리고 부채 비용을 더 높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선진국들은 원유, 천연가스 등 원자재 가격 급등의 충격을 비축유 방출로 흡수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쟁 직후였던 지난 3월 11일 중동 전쟁으로 인한 국제 에너지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4년 만에 전략 비축유 방출을 결정했다. 우리나라도 할당량인 2246만 배럴을 풀었다.
하지만 개도국은 재정 부족으로 비축유를 마련하지 못해 가격 상승의 충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IEA 회원국은 32개국으로 전 세계 인구의 16%에 해당한다. IEA 회원국들이 시장에 대규모 비축유를 풀면 글로벌 석유 시장의 전체 공급량이 늘어 순간적으로 국제 유가가 하락하지만 효과는 일시적이다.
필리핀 에너지청에 따르면 필리핀 내 디젤 가격은 지난 5월 사상 처음으로 리터당 100페소(약 2200원)를 돌파한 이래 고공행진 중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서 송유관 가동 중단 여파가 이어진 지난 22일 기준 디젤은 일주일 전보다 리터당 200원, 휘발유는 100원 가량 올랐다. 알자지라는 “IEA가 비축유를 방출하며 가격 안정화를 시도했지만 이 조치는 역설적으로 비축유가 없는 개도국들의 취약한 현실을 극명히 보여줬다”고 했다.
이 때문에 개도국 간 협력을 제안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지속가능발전정책연구소 칼리드 왈리드 연구원은 알자지라에 “전력 거래, 긴급 에너지 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지역 협정을 추진할 수 있다“며 “남아시아, 아세안, 아프리카, 소규모 섬 개발도상국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원자재 시장 분석가 닐 크로스비는 “많은 개발도상국이 전략 비축분을 쌓을 재정적 여력이 부족하고 전력망 고장이나 정제 능력 부족 등 기술적 문제를 겪고 있다”면서 “화석 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지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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