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이전 순수한 언어의 낙원… 번역자 낯선 언어를 해방시켜[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수정 2026-09-22 23:52
입력 2026-09-22 23:52

<15> 번역자, 신의 저주에 맞선 인간

정확한 번역 없어 숭고한 패배뿐
번역 기계도 인간성은 ‘대체불가’
발터 베냐민·팔레스타인 번역가
언어의 의미 되살려 절망 이겨내
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바벨탑’(1594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제공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창세기’ 11장 중에서)

바벨 이전의 언어를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언어와 세계는 하나였을 것이다. 세계와 세계를 지칭하는 언어 사이에 차이가 없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창조와 다름없는 위상을 지녔을 것이다. 존재와 말이 완전히 일치하는 순수한 언어의 낙원. 그러나 오만의 결과는 참담했다. 언어가 분화하기 시작한다. 하나였던 언어가 둘이 되고 셋이 된다. 그렇게 언어와 언어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꽉 붙어 있던 언어와 세계 사이의 틈이 생긴다.


해석이란 언어와 세계 사이의 그 틈을 메워보려는 서글픈 시도다. 그러나 틈을 메우긴커녕 오히려 벌린다. 해석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으므로. 아니 오히려 또 다른 언어를 태어나게 하므로. 해석은 이해가 아니라 또 다른 오해의 이름이다. 무한히 이어지는 오해 속에서 우리는 영영 낙원을 잃어버린다.

돌아갈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번역은 신의 저주이자 인간의 숙명이다. 결코 같을 수 없는 언어와 언어를 맞붙인다. 정확한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번역가는 없다. 어쩌면 번역가는 ‘포기의 달인’일지도 모른다. 완성되지 못한, 완성될 수 없는 결과물을 끊임없이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 번역가다. 그들의 작업은 불가능의 연속이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전한다. 예정된 실패를 맞이하지만, 패배한 그들의 모습은 숭고하다. 신의 저주에 정면으로 맞서서 인간의 숙명을 뒤집어 보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패배는 그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발터 베냐민




“번역의 자유는 전달되어야 하는 의미를 통해 그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번역의 자유는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의 언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 낯선 언어의 마력에 걸려 꼼짝 못 하고 있는 순수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이다. 이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낡은 장벽을 무너뜨린다.”(발터 베냐민, ‘번역자의 과제’ 중에서)

철학자 발터 베냐민의 에세이 ‘번역자의 과제’를 업(業)의 지침으로 삼지 않은 번역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자신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를 독일어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했던 베냐민은 처참한 실패로서 번역의 당위를 아름답게 논증한다. 베냐민의 주장을 조금 더 과감히 옮기자면, 세상에 오역은 없다. ‘다른’ 번역이 있을 뿐이다. 번역의 목표는 원작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의 이념은 자유와 해방이다. 번역을 통해 언어는 비로소 해석의 족쇄에서 풀려난다. 번역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다. 원작과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과정이다. 해방감을 만끽하는 언어를 보며 우리는 무언가를 감지한다. 그것은 아마도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희미한 기억일 것이다.

‘번역하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번역은 순전히 인간적인 작업이다. 단어와 단어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을 넘어 언어의 저 깊숙한 곳에 담긴 의미의 불꽃을 되살리는 일이다. 이 일은 오직 ‘언어적 존재’인 인간이 수행해야 한다. 번역할 수 있는 권한을 기계에 넘기는 것은 곧 언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언어 사이, 언어와 세계 사이에 놓인 심연을 외면하는 것인 동시에 나아가 인간성 그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번역은 인간이 인간이게끔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번역가가 절망 속에서도 번역을 놓지 않는, 아니 그 절망을 오히려 번역으로 돌파하는 힘이기도 하다.

“가자에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부서진 문장 구조와 부서진 삶들로 만들어진 다리 위를 걷는 일이다. 그러면서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겁고 내려놓기에는 너무 신성한 이야기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다. 그것은 거의 대답하는 일이 없는 바람 속으로 말을 하는 일이며, 오직 그 이름을 말할 용기를 낸 사람에게만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이름들을 속삭이는 일이다.”(알라 알카이시,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중에서)

전쟁의 총성이 끊이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고작 글자를 옮기고 있을 번역자의 마음을 생각한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은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고 미사일을 쏘아댄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번역자는 ‘바람’(風)에 말을 걸기를 택한다. 바람만은 이야기를 들어주겠지. 모든 게 부질없을 수 있지만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바람이 언어를 실어 옮기기를, 누구라도 용기를 내어 그 소리를 듣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어쩌면 이 글은 바람을 통해 전해진 그의 말에 대한 수줍은 답장일지도 모른다. 더 큰 ‘메아리’로 공명하기를, 너무 늦지 않았기를. 두 가지 바람(希)을 담아 답장을 띄운다.

오경진 문화체육부 기자·문학평론가
2026-09-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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