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걱정에 아파도 참던 이주민들… ‘치유열매’ 덕에 병원 찾았다

이현정 기자
이현정 기자
수정 2026-09-22 00:31
입력 2026-09-21 18:09

미등록 이주민 의료비 지원 <끝>

건보 없는 이주민 의료비 1.5~5배
수백만원 부담에 치료 포기 많아
정부 지원은 신분 탄로 날까 꺼려

사랑의열매, 항암·투석 등 대상
76명에게 4억여원 의료비 지원
“한국인 기피 직종서 일하는 이들
아플 때 치료받을 권리 보장해야”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민 하니(가명·42)씨가 지난 15일 경기 평택에서 생후 4개월 된 딸 삼삼(가명)이를 안고 인터뷰하고 있다.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 제공


“내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 아이는 어쩌지. 그게 가장 걱정됐어요.”

지난 15일 경기 화성에서 만난 캄보디아 출신 미등록 이주민 호이(가명·28)씨는 고국에 두고 온 두 살배기 아들 이야기를 꺼내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6월 극심한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그는 급성 담낭염으로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하지만 첫 병원에서 소변 검사 한 번에 20만원이 넘는 비용이 청구됐고, 추가 검사에만 100만원이 더 든다는 말에 진료를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통증을 참으며 병원을 나선 그는 안성과 천안의 병원을 전전한 끝에 그날 밤에야 수술대에 올랐다. 자신이 쓰러지면 고국에 남은 아들의 생계마저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이 그를 짓눌렀다. 수술 후 청구된 병원비는 약 2000만원에 달했다.

2015년 한국에 온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민 하니(가명·42)씨에게도 병원비는 감당하기 힘든 벽이었다. 한국에서 낳은 딸은 태어나자마자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심장에선 작은 구멍이 발견됐다. 여드레 만에 나온 병원비는 약 2600만원. 청소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부부가 여덟 달을 꼬박 일해도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하니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너무 무서웠어요. 돈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어요. 아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심장 문제 때문에 지금도 걱정돼요. 더 좋아지기를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준 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열매의 미등록 이주민 의료비 지원사업 ‘하모니 치유열매’였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민의 입원·수술비와 치료비를 지원하는 사업으로, 사단법인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가 운영한다.



지난 4일 기준 76명에게 총 4억 1654만원의 의료비 지원이 결정됐다. 입원·수술비는 1인당 기본 500만원이며, 중증·응급환자는 별도 심사를 거쳐 최대 1000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항암·투석, 고위험 출산, 필수 재활치료, 응급 외래도 지원 대상이다. 경기 남부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현재 경기 전역으로 확대됐다.

박희은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 정책국장은 “충분한 금액은 아니지만 환자가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붙드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에게 입원·수술비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성인의 일반 외래 진료와 약제비는 원칙적으로 지원 대상이 아니며 예산도 넉넉하지 않다. 게다가 지원받으려면 사업주의 근로 사실 확인서가 필요한데, 미등록 이주민을 고용한 사실이 드러날까 봐 작성을 거부하는 사업주가 적지 않다.

센터가 2022~2025년 미등록 이주민 129명을 조사한 결과 병원에 가지 못한 이유로 59%가 ‘비싼 의료비’를 꼽았다. ‘단속에 대한 두려움’을 꼽은 사람은 13%에 그쳤다. 의료기관을 1년에 한두 차례만 이용한다는 응답도 55%에 달했다. 센터는 진료를 계속 미루다 응급수술이나 중환자실 치료가 필요할 만큼 병이 악화한 뒤에야 병원을 찾는 환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건강보험이 없는 이주민이 부담하는 일반·국제 수가는 의료기관에 따라 건강보험 수가의 1.5~5배에 이른다.

사랑의열매 지원 덕분에 급한 불은 껐지만 두 사람의 짐이 완전히 가벼워진 것은 아니다. 지원금과 병원비 감면을 받고도 호이씨에게는 병원비로 진 빚 약 500만원이 남았다. 가끔 배가 아파도 비용이 걱정돼 정기검진조차 받지 못하지만, 호이씨는 지원기관 관계자들이 건넨 위로를 떠올리며 “몸은 아파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말했다.

하니씨의 걱정도 끝나지 않았다. 생후 4개월 된 딸의 심장 상태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다시 나빠지면 또 한 번 큰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 국장은 “한국인이 기피하는 농축산업과 영세 제조업의 힘들고 위험한 일터에서 많은 이주노동자가 일하고 있다”며 “이들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체류자격이 없다고 범죄자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소한 아플 때 치료받을 권리는 보장해야 하며, 이는 국제사회가 말하는 보편적 권리”라고 강조했다.

호이씨는 E-6 비자로 합법 입국했지만 임신·출산 뒤 남은 체류 기간 안에 새로운 일터를 구하지 못해 미등록 신분이 됐다. 그는 아이와 함께 살아갈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만이라도 단속의 두려움 없이 일하고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니씨에게도 한국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쉽게 떠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그는 “필리핀에서는 30대 중반만 넘어도 나이가 많다며 일을 주지 않는다”며 “저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돌아가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굶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단속보다 고국의 가난이 더 무섭다”고 털어놨다.

“아이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이곳에 머물 기회를 줬으면 해요. 필리핀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곳에서는 돈이 없으면 치료받지 못해 죽을 수도 있어요. 아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줄 수 있도록 한국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공동 기획- 서울신문, 사랑의열매

이현정 기자
2026-09-2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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