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병기창에 ‘벚꽃동산’ 유리집 올린 사울 킴 “무대는 사라져도 아이디어는 영원”

최여경 기자
수정 2026-09-19 12:00
입력 2026-09-19 12:00
서울에서 하얀 박스 안에 놓인 듯했던 유리집이 미국 뉴욕에서는 섬처럼 앉았다. 연극 ‘벚꽃동산’의 무대를 설계한 무대 디자이너 사울 킴(32)은 서울과 부산, 홍콩, 싱가포르, 호주 애들레이드를 거친 이 집이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만 달라졌다고 했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한 ‘벚꽃동산’ 공연을 앞둔 15일(현지시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이를 “표현 방식의 차이”라고 정리했다.
‘벚꽃동산’이 오르는 아모리는 19세기 후반 뉴욕 주방위군의 무기고로 지어진 공간이다. 서울 초연 당시 ‘벚꽃동산’은 무대 위에 들어선 2층 높이의 현대적인 유리집으로 시선을 끌었는데, 이번에는 공간의 역사까지 겹쳐 전체 그림이 달라졌다.
킴은 “사이먼 스톤 연출은 역사 깊은 이 공간 자체를 노출하고 싶어 했다”면서 “서울에서 배경을 맡던 벽과 바닥이 없어진 상태로 무대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지붕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리던 선이 수정되면서 무대를 살짝 높이고 시각선을 맞추는 새 베이스를 설계했다. 그는 “이전에는 무대 위에 집이 있었다면 지금은 집이 작은 베이스 위에 올라가 있다”고 덧붙였다.
뒤에는 검은 막을 드리웠지만 아모리 내부가 부분적으로 보여 시간을 알 수 없는 집과 옛 산업 공간이 대비를 이룬다. 서울의 흰 벽은 조명의 색을 받아 해가 뜨고 지는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검은 막은 색을 담지 못한다. 대신 집 내부의 LED가 색을 바꾼다. 그는 “한국 무대가 라이트 박스 안에서 찍은 사진 같았다면 이번에는 스포트라이트 밑에서 일어나는 무대”라고 비유했다. 극장이 아닌 훨씬 큰 볼륨의 공간에 작품이 오브제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도 했다.
삼각 지붕의 하얀 집은 안정과 불안의 공존을 의미한다. 한쪽은 바닥과 이어져 안식처가 되지만 반대편은 지면이 끊겨 낭떠러지가 된다. 킴은 “삼각형과 부드러운 곡선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간이라면 반대편은 불안을 표현하는 낭떠러지”라고 풀이했다. 흰색은 특정 시대를 지우기 위한 선택으로, 스톤은 이를 ‘화이트 보이드’라 불렀다.
건축 디자이너로 살아온 킴에게 ‘벚꽃동산’은 첫 무대 작업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다양한 디자인을 공유하며 18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그에게 스톤이 먼저 연락해 왔다. 연작 ‘아키텍처 아노말리’의 이미지가 스톤이 찾던 무대에 가까웠다. 스톤은 수백 개의 디자인 중 두 개를 골라 함께 무대로 풀어보자고 했다.
안톤 체호프(1860~1904)의 희곡을 잘 몰랐던 킴은 지면과 건축의 관계를 고민하고 인물과 동선을 파악하며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 제시했다. “자유도를 주는 것이 목표였다”는 그의 말대로 생각지도 못한 활용이 다양하게 나왔다. 둘째 딸 해나(이지혜 분)가 송도영(전도연 분)의 휴대전화를 창고에 던지는 장면이 그 예다. 그 용도로 만든 공간이 아니었는데 스톤이 즉흥적으로 살렸다. 킴은 “공간을 많이 만들어 놓고 다양한 옵션을 주니 이렇게 창의적으로 활용하네”라는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고 떠올렸다.
집 내부를 보여주는 데는 아크릴을 써도 되지만 스톤은 유리를 고집했다. 안팎의 경계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진짜 유리여야 했고, 유리창은 안과 밖의 소리를 가르는 역할도 했다.
건축 디자이너인 킴에게 무대는 법규가 없는 세계이기도 했다. 건축에서는 안전을 위해 피난 동선의 문 크기를 절대 건드리지 않지만, 무대에서는 지붕에 난간이 없어도, 계단 높이가 제각각이어도 된다. 배우들과 약속만 되면 충분히 쓸 수 있는 부분이라 “되게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었다”고 킴은 전했다. 반대로 무대의 시각적 트릭 가운데 건축에 가져다 쓸 만한 것도 보였다.
그는 “건축가로서 전면이 유리인 삼각 지붕의 집을 보면 ‘배수관은 어디 있지’, ‘물은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며 웃더니 “건축에서는 방수와 단열이 굉장히 중요하고 이런 게 잘 돼야 좋은 설계라고 할 수 있는데, 무대는 그런 한계가 없는 자유로움이 좋았다”고 했다. 앞을 보여주고 뒤를 숨기는 고민, 지붕이 갖는 시각성, 다락방의 활용 등에서도 많은 것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빛이다.
“건축에는 햇빛만 있는데 무대에서는 빛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뉴욕 공연이 끝나면 이 집은 해체된다. 킴은 “도면과 아이디어는 영원하기 때문에 아쉽지 않다”면서 “건축은 지어놓고도 사람들이 쓰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데 무대에서는 배우들이 공간을 창의적으로 쓰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회전무대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워했다.
‘벚꽃동산’은 그의 자리를 바꿨다. 제품과 가구, 전시로 영역이 넓어졌고 그는 이제 스스로를 건축가 대신 디자이너라 부른다. 모든 의뢰는 인스타그램에서 온다. 좋게 말하면 글로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로컬 시장이 없다는 자각도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주택과 네덜란드 소도시 고스에 세울 전망대 디자인이 진행 중이다.
한 번의 강렬한 무대 경험은 그에게 공연에 대한 관심과 영화 세트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궁극의 목표는 자동차다. 정상급 디자이너만 닿을 수 있는 영역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킴은 “그 레벨에 도달해 무엇이든 디자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이미지들을 보고 무대가 될 수 있다고 믿어준 스톤 연출에게 감사하다”고 밝혔다.
스톤의 ‘벚꽃동산’은 원작의 몰락한 러시아 귀족을 한국 현대사회의 재벌 3세로 치환했다. 여성 영주 라넵스카야(류바)는 송도영으로, 농노 출신 신흥 자본가 로파힌은 재벌가 운전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황두식(박해수 분)으로 바뀌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가 한국에 돌아온 송도영은 가족 기업이 기울고 집이 사라질 위기를 맞닥뜨린다. 2024년 서울에서 초연한 뒤 부산, 홍콩, 싱가포르, 호주 애들레이드를 거쳐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9월 16일 개막해 26일까지 이어진다.
뉴욕 최여경 선임기자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