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인지적 항복

이순녀 기자
수정 2026-09-18 00:50
입력 2026-09-17 21:47
며칠 전이었다. 형광펜이란 단어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인공지능(AI)에게 물었다. “특정 내용을 돋보이게 할 때 사용하는 펜을 뭐라고 하지?”
노화로 기억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걸 체감하는 요즘이다. 대화 중에 ‘그게 뭐였지’, ‘그거 있잖아’ 같은 애매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럴 때 스무고개 하듯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짚는 수고로움 대신 AI가 금방 원하는 답을 찾아주니 얼마나 편한지.
그런데, 이래도 괜찮은 걸까. 굳어가는 뇌를 자극해 기억을 살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채 매번 AI에게 의존한다면 뇌의 노화는 더 빨라지는 게 아닐까.
AI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생각의 ‘외주’를 넘어 생각의 ‘포기’를 의미하는 ‘인지적 항복’(cognitive surrender) 개념까지 등장했다.
미국 MIT AI사용 연구위원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학생들이 조금만 어려움을 느껴도 스스로 고민하는 대신 AI에게 답을 맡긴다”면서 실제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배웠다고 느끼는 ‘학습의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나부터 당장 돌아봐야겠다.
이순녀 수석논설위원
2026-09-1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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