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언어를 실험하는 사람 …외국어로 순수한 낯섦을 보죠”

오경진 기자
수정 2026-09-17 20:41
입력 2026-09-17 20:41
방한한 독일 시인 울리아나 볼프
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번역독일어 시로 문법·관념 문제 넘어
언어와 언어가 서로 대화하는 詩
예상치 못한 ‘불안정성의 즐거움’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독일 시인이 독일어로 시를 쓰는 일은 곧 독일어와 싸우는 것이었다. ‘모국어’를 향해 칼을 겨누는 시인의 손에 들린 무기, 그것은 바로 ‘외국어’다. 언어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라면 우리는 외국어를 통해 비로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그 ‘순수한 낯섦’이 바로 시인의 힘이다.
2026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동독 출신 시인 울리아나 볼프(47)를 17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만났다. 독일과 미국을 오가며 여러 문학상을 거머쥔 시인이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된 작품이 없다. 그럼에도 시를 즐겨 읽는 독자들은 볼프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시인 박술과 함께 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독일어로 옮긴 번역가로 이름을 알렸다.
독일어판 ‘죽음의 자서전’은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 있는 연방 공공기관 세계 문화의 집(HKW)이 수여하는 국제문학상을 받았다. 아시아인 시인이 쓴 시집이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삶과 죽음, 인칭과 무인칭, 나와 너를 자유로이 오가며 독특한 시적 상상력을 뽐냈던 김혜순의 시가 독일어의 한계를 깨뜨렸다는 게 볼프의 생각이다.
“독일어로 옮겨진 김혜순의 시가 어떻게 ‘독일어 시’가 될 수 있는지 살폈습니다. 당연히 완벽하게 떨어지지 않았죠. 결국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야 했습니다. 김혜순의 시는 읽을 때 소리와 리듬이 중요합니다. 그냥 읽으면 난해하지만, 자세히 보면 굉장히 꼼꼼한 건축이기도 합니다. 독일어에는 없는 표현들, 독일인들에게는 낯선 생각들이 그의 시에 담겨있죠. 김혜순의 시를 번역하며 독일어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볼프가 가장 처음 부딪힌 난관은 한국어와 독일어의 문법 차이였다. 한국어는 때때로 문장에서 주어를 생략한다. 문장의 의미가 발화되는 상황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어를 포함한 서양어에서는 반드시 주어가 있어야 한다. 문장 안에서 누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과제가 원저자인 시인이 아니라 번역가에게 주어진 것이다. 관념상의 문제도 번역자를 시험에 들게 했다. 김혜순이 그린 사후세계는 불교와 무속신앙이 얽힌 지극히 ‘한국적인’ 공간이다. 독일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사후세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번역은 단순히 말을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하나의 문화를 또 다른 문화로 옮겨내는 일이다. 대부분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 안에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반짝인다. 시인과 번역가가 찾으려는 건 바로 이것이다.
“진리가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한 그것은 절대로 안정적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세계를 일부러 불안정하게 만드는 작업을 즐깁니다. 언어를 가지고 노는 시인이 잘할 수 있는 일이죠.”
볼프는 동서독이 분단돼 있던 1979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는 어린 볼프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줬다.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나라가 사라졌다. 시인은 당시를 “언어를 제외하고 모든 게 달라져 버렸다”고 회상했다. 볼프의 시를 특징짓는 말은 ‘불안정성’이다. 이 감각은 시인의 유년 시절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불안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며 불꽃이 튀는 지점을 장난스럽게 포착한다. 언어유희의 정신은 볼프가 시를 쓰는 원동력이다. 그는 “시에서 언어와 언어가 서로 대화하면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절망이 만연한 시대에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시인은 언어를 실험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죠. 마치 어린아이가 순수하게 장난을 치는 것처럼요. 서서히 가라앉는 현실 자체는 되돌릴 수 없지만 시간을 늦출 수는 있을 겁니다. 아주 경쾌하게, 사람들을 웃게 하면서요.”
오경진 기자
2026-09-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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