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단군 신화의 개척자”… 잊힌 존재서 예술의 새 지평 열다

윤수경 기자
수정 2026-09-14 00:15
입력 2026-09-13 17:52
‘호반미술상 수상자’ 이수경 작가
수상 작가전 ‘범여인’ 신작 발표“마그마처럼 삶 개척한 여정 상상”
동아시아 옛날 여성 서사에 주목
대만 선보인 ‘번역된 도자기’ 소개
343가지 서로 다른 조합 ‘달빛 왕관’
“사랑에 빠진 작업인지 스스로 질문”단군신화 속 범은 곰과 함께 사람이 되기를 빌었지만 금기를 지키지 못해 실패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컴컴한 동굴에서 빛을 향해 뛰쳐나간 호랑이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거대 서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범은 정녕 실패자일 뿐일까.
버려지고 잊힌 존재들, 실패나 오류로 규정된 것들에서 전복을 엿보고 기꺼이 숨을 불어넣어 온 이수경(63) 작가가 지난 3일 ‘2026 호반미술상’을 거머쥐었다. 이 상은 수십 년간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며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혀온 그에게 보내는 헌사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수상작가전 ‘아직, 이제는, 여전히’를 선보이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홍윤기 기자
“호반미술상은 제가 미술가로 활동하며 처음 받는 상이라서 더욱 뜻깊어요. 이 수상을 계기로 전시까지 열게 된 점도 그렇고요. 전시에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도 다가올 날의 두려움도 없이 모든 것이 다 괜찮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단군신화 속 잊힌 존재인 ‘범여인’을 소환해 신작 ‘달빛 왕관_다정한 자매들_범여인 이야기’를 선보인다.
“중간에 동굴을 뛰쳐나간 범에 대한 호기심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천신의 규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을 그 여정을 상상해 보게 됐죠. 제 안에서 마그마가 뿜어 나오듯 이 작품을 할 수 있게 이끌어주고 신화 속 삭제된 존재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펼칠 수 있게 해준 이번 상을 평생 기억할 것 같아요.”
윤수경 기자
작품은 지표면을 뚫고 나와 검게 엉켜 굳어버린 마그마처럼 솟아오른 형태다. 암석 같은 검은 덩어리 속에는 왕관의 파편과 동서양 서사에서 차용한 장식적 이미지들이 박혀 있다. 가장 아래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양손으로 이 구조물을 지탱하고 있는 ‘범여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 작가는 신화, 설화, 민담처럼 오래된 이야기,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서사에 주목해 왔다.
“동아시아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특히 여성 설화에서 연약한 존재들이 엮어낸 시간의 금강석을 발견하곤 하죠. 바리데기 설화처럼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어느 순간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거죠.”
이수경을 대표하는 ‘번역된 도자기’ 시리즈 역시 버려진 파편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결을 같이한다. 장인들이 실패작이라며 깨버린 도자기 조각을 하나하나 이어 붙인 작품은 재생과 치유의 상징으로 읽힌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해 타이베이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작품 ‘번역된 도자기_우리가 다시 만날 때’도 만날 수 있다. 전시 공간을 채운 가로 387㎝, 세로 275㎝ 규모의 작품에는 당나라 여인 기마상이 포함돼 있다. 작가는 “실크로드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밖에도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위해 제작된 크리스털 구슬을 꿰어 만든 걸개 형태의 작품 ‘무제’,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 20주년을 맞아 기획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그곳에 있었다_청계천2025’와 연관된 퍼포먼스 영상 작업 등도 만날 수 있다.
호반문화재단 제공
조각뿐 아니라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신작 ‘달빛 왕관’도 선보인다. 실시간 인터랙티브 영상 작업인 이 작품은 과거 작품 7점을 선별, 각각의 작품을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로 구분해 343가지 서로 다른 조합이 나오도록 구성했다. 달의 위상 변화, 기상 데이터, 태양의 고도 등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데이터를 반영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0여 년간 새로움에 도전하며 화업을 이어온 그를 추동하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서슴없이 ‘사랑’이라고 답한다.
“저는 늘 사랑에 빠진 상태로 작업을 하는 사람이에요. 사랑이 식어버린 것, 재미없는 것은 좋아하지 않죠. 작업할 때 ‘나는 지금 이 작업이 재미있는가’, ‘나는 지금 심각하게 사랑에 빠져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항상 질문합니다.”
전시는 오는 27일까지.
윤수경 기자
2026-09-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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