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 후 일곱 개의 시선

최여경 기자
수정 2026-09-11 00:17
입력 2026-09-11 00:17
헛되이/최영미 지음/이미출판사/156쪽/1만 5000원
최영미 등단 35년 맞아 첫 시선집사랑·싸움·일상·가족 등 62편 품어
이미출판사 제공
1994년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서점가를 뒤흔들었다. 솔직하고 대담하게 한 시대의 정서를 뿜어낸 첫 시집으로 시인은 단번에 문단을 이끄는 ‘30대 기수’로 올랐다. 그해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50만 부가 팔렸다. 그로부터 32년, 시인은 일곱 권의 시집을 세상에 더 냈고, 등단 35년이 된 올해 자신의 시를 꼽아 첫 시선집을 출간했다.
최영미(65) 시인의 ‘헛되이’는 사랑, 싸움, 일상, 시, 가족 등 주제를 봄날, 삼월,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등 일곱 갈래로 나눠 62편을 품고 있다. 사랑의 한쪽 끝에는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선운사에서’ 부분) 같은 나긋한 연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손을 잡고// 나의 저녁이 너의 저녁과 합해져/ 너의 욕망이 나의 밤을 뒤흔들고”(‘연인’ 부분)처럼 관능이 있다.
시인은 사랑의 언어를 관념으로 치장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최영미라는 이름과 떨어뜨릴 수 없는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대표적이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누군가는 치열하게 살아온 1980년대를 기록하고 성찰한다고 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운동권의 삶을 추억담으로 소비한다고도 했다.
긍정과 부정의 시선을 받은 투쟁의 시간은 ‘삼월’의 시들이 증언한다. ‘En선생’, ‘K시인’, ‘Me too’, ‘노털상’ 등 여러 단서를 담아 문단을 폭로한 시 ‘괴물’을 담고, 문단의 오랜 침묵을 깨뜨린 뒤에는 문장을 남겼다. “내가 칼을/ 다 뽑지도 않았는데/ 그는 쓰러졌다”(‘팜므 파탈의 회고’ 부분).
편집 과정의 진통 또한 이 책의 일부다. 첫 시집에 실린 시를 수록하면서 마지막 행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새로운 시간을 입력하세요/ 그는 점잖게 말한다// (…)연습을 계속할까요 아니면/ 메뉴로 돌아갈까요?/ 그는 물어볼 줄도 안다// (…)친구보다도 낫다/ 애인보다도 낫다”(‘Personal Computer’ 부분). PC 대신 인공지능(AI)이라고 제목 붙여도 좋을 내용이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명확하지만 마지막 한 행이 앞의 좋은 표현들을 삼킨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그 행을 지웠다. 서른 해 넘게 지켜온 문장을 스스로 거둬들이는 일 또한 시인의 몫이다.
한 편 한 편 넘기다 보면 제목은 결국 반어로 읽힌다. 그의 시간이 과연 헛되었을까.
최여경 선임기자
2026-09-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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