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를 거라고 착각하지 마”… 작은 악의가 피어올랐다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수정 2026-09-11 00:16
입력 2026-09-11 00:16

대부호/성혜령 지음/문학동네/296쪽/1만 7500원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미묘한 마음
‘악하다’고 하기조차 머쓱한 감정
사소한 내 상처가 먼저인 이기심

툭툭 던지는 문장들에 담긴 매력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닮은 내 자아
단편집 ‘대부호’를 낸 소설가 성혜령은 평범한 일상에서 피어오르는 소시민의 악의를 미세하게 포착한다.
ⓒ최모레


소시민의 구차한 일상에서 아주 작은 악의(惡意)가 피어오른다. 너무 사소해서 ‘악하다’고 부르기조차 머쓱한 그 감정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소설을 다 읽은 독자는 나에게도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마음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소설가 성혜령(37)의 신작 단편집 ‘대부호’에는 바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흘러가고 있을 법한 평범하고도 슬픈 삶의 이면을 펼치는 소설 여덟 편이 실렸다.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문장이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가 품고 있는 통찰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는다. 잘 정돈된 소설의 구조 안에서 독자가 스스로 그것을 느끼게끔 한다.


“대부호는 대부분의 카드 게임과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카드를 먼저 없애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승리한 사람은 대부호가 되고 꼴찌는 대빈민이 된다. 다음 게임 시작 전에 대빈민은 대부호에게 가장 강한 카드 두 장을 바쳐야 하고, 반대로 대부호는 대빈민에게 약한 카드 두 장을 버릴 수 있다.”(‘대부호’ 중에서)



가족 넷이 꾸려 가던 삶에서 이제는 둘만 남았다. 오빠는 대학 입학 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냉동창고에 갇혀 죽었고, 화물차를 운전하던 아빠는 야간 운전 중 휴게소에서 쪽잠을 자다 돌연사했다. 표제작 ‘대부호’는 엄마의 번호로 걸려 온 낯선 이의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병원 응급실이라는 전화 속 목소리를 듣자마자 주인공 이자숙은 지레 최악으로 앞질러 간다. 엄마도 죽었구나, 이제는 혼자 남았구나. 그러나 다행히 가벼운 사고였다.



엄마는 어디서 넘어졌을까. 태극기와 성조기를 가방에 챙겨 꼬박꼬박 집회에 나가는 엄마. 집에서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위기에 처했다고 성토하는 유튜버의 방송을 들으며 열을 올리는 엄마. 세상엔 둘만 남았지만, 두 사람이 각자 서 있는 세계는 너무나도 멀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가장 강한 것을 ‘바치고’,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가장 약한 것을 ‘베푸는’ 세상의 규칙을 바꿀 수 있는 건 바로 ‘혁명’이다. 그러나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단 한 번이라도 혁명이 성공했던 적 있었나. 빈자가 부자를 압도하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와해와 갈등은 오직 빈자들의 몫이다. 자숙과 엄마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대부호 게임이 시작된다.

“나방파리가 벽에 앉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손끝으로 재빨리 짓이기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몇 마리나 죽였을까. 그중에는 알을 품고 있거나 갓 태어난 새끼들도 있었을까. 언니는 신을 생각했다. 무심한 손짓 한 번에 시온이가 죽은 걸까?”(‘나방파리’ 중에서)

소설 ‘나방파리’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줄타기하며 고통과 복수의 문제를 치밀한 구조 안에 담은 수작이다. 아들이 죽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엄마는 이유를 찾는다. 혹시 나방파리를 죽인 것 때문일까. 화장실에서 으레 마주치는 나방파리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그것이 잠시 비행을 쉬고 있을 때 꾹 눌러 죽여보지 않은 사람 누가 있을까. 죄책감은커녕 무언가를 죽였다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혹시 이것으로 신이 노한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이 사건이 내 아들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 누군가에게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2021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성혜령은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등을 받았다. 일상에서 소설적 사건을 잡아채는 감각이 탁월하다. 좀처럼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인간의 미묘한 마음을 정교한 구조로 재현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저마다 특수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독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악의의 핵심을 꿰뚫는, 소설 속 인상적인 한 문장이 있다.

“눈앞에서 누가 총을 맞고 쓰러져도, 종이에 베인 내 손가락 상처가 더 아픈 게 인간이야. 언니는 다를 거라고 착각하지 마.”(‘베인’ 중에서)

오경진 기자
2026-09-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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