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호박잎을 씻다가
황수정 기자
수정 2026-09-07 04:48
입력 2026-09-07 00:56
나들가게에 끝물의 호박잎 묶음들이 소복했다. 칠팔월 뙤약볕을 건너 용케도 보드라운 잎사귀를 품고 있었구나. 대견해서 덥석 안아 왔다.
호박잎을 다듬는데 낮에 본 길갓집 풍경이 떠올랐다. 늙은호박 넝쿨을 담장 위로 쓸어올려 주던 할머니. 뺨 붉은 시절, 귀밑머리 쓸어올린 손끝이 저랬을까. 할머니 떠나고 나면 가을은 서운해서 어찌 오려는지. 누가 있어 늙은호박들은 마음 터놓고 속을 익히려는지.
호박잎을 살살 달래며 씻다가 나는 왜 프랑시스 잠의 시가 생각났을까. 인간의 위대한 일이란 덜거덕거리는 베틀 소리와 올빼미와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를 조용히 듣는 것.
밥물에 얹어 설지도 무르지도 않게 호박잎을 쪘다. 호박잎 푸른 물이 기적처럼 스민 밥 한 공기, 잘박한 강된장 종지. 저녁 밥상은 위대한 일로 가득하다.
미련한 내 귓가로 귀뚜라미 소리 환하게 걸어온다. 저 거기 있다고 밤 깊어 발을 동동 구르며 운다.
나는 마르는 풀처럼 낮아질 수 있을 것 같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풀벌레 울음을 천둥처럼 크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인가.
황수정 논설실장
2026-09-0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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