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삶도 없는 것인가”… 0원 살이로 자아 찾는 ‘담요를 입은 사람’

김기중 기자
김기중 기자
수정 2026-09-07 04:33
입력 2026-09-07 04:33

자급자족 여행 기록한 다큐멘터리

숨만 쉬어도 돈 나가는 현실에 분노
“존재 이유 목숨 걸고 증명하고 싶어”
슬로바키아의 한 외딴 들판에서 히피들이 대형 트럭 주변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9일 개봉하는 ‘담요를 입은 사람’은 박정미 감독의 ‘0원 살이’ 여정을 기록한 영화다.
시네마달 제공


돈 없이 1년을 살 수 있을까.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데, 박정미(사진) 감독은 이를 해냈다. 그것도 무려 2년이나.

9일 개봉하는 ‘담요를 입은 사람’은 박 감독의 자급자족 여행을 기록한 1인칭 시점 다큐멘터리다. 12년 전인 2014년, 20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운 좋게 직장을 구했지만 과도한 업무, 상사와 심한 갈등에 직장을 또 그만뒀다. 수중에 있는 돈은 집세 두 달 치도 안 되는 300달러(약 45만원)가 전부였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현실”에 분노한 그는 선언한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1년간 살아보겠다.”


박 감독은 한곳에서 한 달 이상 머무르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목에 액션캠 하나 건 채 ‘0원 살이’를 시작한다. 버려진 음식을 줍는 ‘스킵 다이빙’을 하고, 비어 있는 건물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스쿼팅’도 해본다. 유기농 자급자족 농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숙식을 해결한다. 전 세계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대한 자연 상태에서 살아보는 ‘레인보우 개더링’ 행사에도 참여했다. 우연히 마주한 대형 트럭 여행에 동참해 히피들과 지내기도 했다.

‘담요를 입은 사람’을 연출한 박정미 감독.
시네마달 제공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박 감독은 “돈이 없으면 삶도 없는 것인가 질문과 마주했다. 제 존재 이유가 돈 버는 게 아닐 것이라는 점을 목숨 걸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여행을 시작한 계기를 소개했다.



과잉 생산과 낭비에 질문을 던지는 환경 영화, 혹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블랙코미디 영화처럼 느껴지던 그의 여정은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공동체에서 만난 이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한 걸 알게 되면서다. 박 감독은 고민 끝에 1년을 더 살아보고 답을 찾기로 했다. 이후 ‘자아를 찾는’ 여정이 펼쳐진다.

영화 제목 ‘담요를 입은 사람’은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즘 수행자를 가리키는 ‘데르비쉬’에서 따왔다. 담요 하나만 걸치고 종교적 실천을 행하는 이들은 밤이면 길에서 담요를 덮고 잠을 잔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박 감독의 여정이 마치 데르비쉬의 수행처럼 느껴진다.

런던에서 웨일스, 슬로바키아, 그리스 등 유럽을 건너 이란, 고향인 한국에 이르기까지 여정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잘 씻지도 못한 채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여성으로서 위험스러운 일에 빠진 순간도 가감 없이 담겼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공동체의 모습이 이색적이고, 외부인을 이유 없이 환대해 주는 현지인의 모습은 관객을 미소 짓게 한다.

박 감독은 지난 여정에 대해 “저는 늘 무언가로부터 도망쳤는데, 그 이유는 두려움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공동체가 지향한 의식들이 씨앗이 발아하듯 천천히 제 삶에 들어왔다. 만난 사람들 모두가 나한텐 소중한 경험”이라고 밝혔다.

박 감독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전남광주 진도·구례군 등지에 살며 소비 없는 삶을 이어왔다. 2년간 여정을 담은 에세이집 ‘0원으로 사는 삶’을 2022년 출간했다. 이후 영화 공부를 하고 이번에 첫 영화를 완성했다. 현재 비구니 스님들 공동체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며, 어디에 있든 ‘집에 있는 마음’으로 머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박 감독은 “여전히 두려움과 동행하고 있다”며 “마음의 정착을 위한 여정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김기중 기자
2026-09-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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