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챙긴 돌이 정 맞는다… 너는 뒤로 빠져라”

홍희경 기자
수정 2026-08-26 03:26
입력 2026-08-26 01:02
급식 파행 수습하자 기소·징계
판결이 직역 관행 무너뜨려도
현장 맥락 무시한 기계적 재판
판결 뒤 파장 모르쇠, 언제까지
미역 자르기, 계란 깨기 같은 식재료 손질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탄생한 ‘미역 없는 미역국’과 ‘달걀 없는 오므라이스’. 지난해 봄 대전의 한 여고 조리실무사들이 폭염 속 고강도 노동과 열악한 급식실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한 결과 식판에 오른 음식들이다. 이 메뉴들은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급식실의 조리실무사들에게는 폭염과 열악한 환기 시설 속에서 “더는 못 하겠다”는 노동의 한계선이었다. 반면 학부모들은 “학교가 내 아이에게 이걸 먹였다”며 부실급식의 증거로 받아들였다.결국 조리실무사 파업으로 전교생이 조기 하교하는 사태에 이르자 교장은 보건증을 발급받아 교직원들과 함께 직접 조리와 배식에 나섰다. 그리고 학교운영위원회 의결을 거쳐 석식을 중단했다. 노조는 석식 중단으로 연장근로 수당이 사라진 것이 파업에 대한 보복이자 직장폐쇄라며 교장을 노동청에 고발했다. 검찰이 이를 받아들여 지난 5월 벌금 250만원에 교장을 약식기소했고, 기소 통보를 받은 대전시교육청은 교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교장은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교총은 “학생의 급식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 관리자로서 불가피하게 내린 판단을 형사처벌하고 징계까지 이어 가고 있다”며 반발했다. 2014년 대법원은 학교 비정규직의 사용자가 학교장이 아니라 교육감이라고 판시했지만, 이번 약식기소는 교섭권도 인사권도 없이 급식실 파행을 수습한 교장을 노조법상 사용자로 봤다. 권한은 교육청에 두고 책임은 교장에게 지운 이 처분을 법원이 그대로 인정한다면, 전국의 교장들이 배울 교훈은 명확하다. 급식이 멈춰도 절대 나서지 말 것.
이번 재판으로 노조법 위반 여부뿐 아니라 학교 현장의 파행 앞에 나서는 게 합당한 행동인지 가려지게 되겠으나, 사법부가 그 사정까지 헤아릴지는 반신반의다. 특정 상황에서 달리 행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 ‘기대가능성 법리’를 진지하게 적용한 판결 사례를 최근 본 일이 드물어서다. 이 사건에서 기대가능성 요소를 심리하려면 석식 중단이 직장폐쇄인지 노조법 조문만 따질 것이 아니라 740명의 급식이 멈춘 현장에서 교장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를 심리해야 한다. 이 판단이 빠진 채 약식기소 명령 그대로 1심 판결이 나온다면 ‘위기 앞에 나서지 마라’는 새로운 금기가 전국의 학교로, 그다음에는 비슷한 직역으로 퍼질 수 있다.
재판 대부분은 소송 당사자 간 이해를 조정하는 일이다. 양측이 낸 서면을 면밀히 저울질하는 것만으로도 충실한 심리가 된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판사를 최고 학벌의 엘리트로 키워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신분상 특권을 부여한 근거가 궁색해진다. 직업윤리와 역할 공백, 제도의 빈틈 같은 맥락이 녹아든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기준을 제시하는 것도 판결의 책무다. 법정 제출서류의 구성요건을 대조하고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데 그친다면, 솔로몬을 기대한 사회에 채점관으로 답하는 셈이다.
이미 의사들이 처벌될까 두려워 필수의료를 기피하고 교사들이 아동학대 신고에 지쳐 생활지도를 포기하는 지경이다. 그런데도 사법부는 판결 이후 세상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법원은 오히려 처벌이 필요한 개별 사정을 몰라준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판결이 직역 전체의 관행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개별 사안의 특수성에 따른 것이었다면, 그 경계를 분명히 알리는 일 또한 사법행정의 책무다. 현장에서 위기에 맞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 처벌받는 것을 본 직업인들이 판결의 맥락을 가려 읽지 못한 채 최악을 가정하고 도망친다고 탓할 수는 없다.
모두를 감동시켰던 ‘노무현 연설’은 2001년 대선 출마 선언과 함께 시작됐다. 독재에 맞서 데모하는 자식들을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라며 말릴 수밖에 없던 시대를 노 전 대통령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친 역사’라고 일갈한 연설이다. 그로부터 25년.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의 기능을 유지시키려 했던 이들에게 ‘방관의 교훈’을 가르치려는 판결의 기로에 이번에는 대전의 한 교장이 섰다.
홍희경 논설위원
2026-08-2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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