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도 세대도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조사 기한 만료를 앞두고 연 기자회견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박다운 기자
특별법 제정에도 ‘빈손’ 이태원 특조위… 엇갈리는 유가족들대형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규명 기구가 출범하지만, 정작 조사와 책임 규명이 지연되면서 유가족들이 각자도생에 나서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가가 신뢰할 만한 조사를 신속하게 마무리하지 못하면 유가족 사이의 이견이 갈등과 고립으로 이어지고, 피해자들의 회복마저 늦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오일석씨 등 약 20명은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 달 16일 활동 기간 종료를 앞둔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전면적인 혁신을 정부와 국회에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특조위의 조사 성과가 미흡하다고 합니다. 유가족들은 “지난 1년 3개월 동안 특조위가 조사를 마치고 의결한 사안은 사망한 이태원 상인을 160번째 희생자로 인정한 한 건뿐”이라며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밝힌 결정은 전무하고 지난해 발표하겠다고 한 중간 조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특별검사(특검) 수사 요청 조항’ 신설 등 이태원참사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국회에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특조위 활동 기한 연장에 주력해 온 기존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공식 입장과는 결이 다른 행보입니다. 2024년 ‘이태원참사진상규명법’ 제정으로 조사 기구의 틀은 갖춰졌음에도 실질적인 성과가 없자, 단순한 기한 연장보다 수사 방식의 근본적 전환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유가족 내부에서 터져 나온 셈입니다.
앞서 지난 11일 일부 유가족이 송두환 특조위원장과 박진 사무처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경 합동수사팀에 고소한 것도 장기화한 조사에 대한 누적된 불신이 표출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12·29 여객기 참사 ‘총체적 부실에 대한 특별법개정및 국가위로금 추진결사(총특위추)’ 소속 유가족들이 13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공항 분향소앞에서 한성숙 총리 참배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반복되는 엇갈림… 12·29 참사 유가족도 “추가 검증” 촉구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이라는 같은 목표를 두고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사례는 이태원 참사가 처음이 아닙니다.
12·29 여객기 참사 유가족 사이에서도 진상규명 방식과 조사 주체를 둘러싼 목소리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국회는 올해 1월 로컬라이저 둔덕의 설계·관리 문제와 사고 조사·수사 과정, 조사기구의 독립성 등을 담은 국정조사 결과보고서를 채택했으나, 같은 날 국정조사 기간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2·29 여객기 참사 역시 피해자들의 일상과 공동체 회복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이 마련돼 있습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와 산하기관의 책임을 조사해야 하는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국토부 소속이라는 점에서 ‘셀프 조사’ 논란이 불거지며 유가족들의 불신을 키웠습니다.
일부 유가족은 별도의 모임인 ‘총체적 부실에 대한 특별법 개정 및 국가 위로금 추진 결사’(총특위추)를 꾸렸습니다. 이들은 기체 결함과 조종사 과실, 항공사의 훈련·정비 문제 등에 대한 추가 검증과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국토부 등을 압수수색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지만, 유가족 사이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도 나옵니다. 김윤미 총특위추 대표는 “참사가 발생한 지 1년 8개월이 지났고 국정조사에 이어 세 차례 압수수색까지 했지만 아직 해결된 것이 없다”며 “진상규명이 지지부진할수록 조사 방식과 과정에 의문을 품는 유가족이 생겨나 나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전국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연대가 연 기자회견이 끝난 뒤 고 서영철 대표의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서 대표는 지난 11일 기흉으로 서울대병원 응급센터를 찾았으나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연합뉴스
“각자도생 내몰린 유가족… 국가의 신속한 진상규명·조율 시급”‘미완’의 참사는 더 많습니다. 지난 11일 서영철 전국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연대 대표가 사망하면서 피해자 연대들은 광화문 농성에 나섰습니다. 피해자 단체들은 지난 3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개정 특별법에 피해 인정 범위를 확대하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2기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속도감 있는 조사가 필수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유가족의 분화를 단순히 내부 갈등으로 볼 일이 아니라고 꼬집었습니다. 참사의 원인과 국가·기업의 책임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유가족이 각자 필요한 답과 해결책을 찾아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조사 지연은 정보의 불균형과 불신을 키우고, 피해자 지원 체계가 각 유가족의 다른 요구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면 상실과 분노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심민영 전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본질적으로는 국가가 유가족이 신뢰할 수 있는 진상규명을 빠르게 진행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며 “유가족 안의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고, 행정적 이유로 소통 창구를 단일화하기보다 여러 이야기를 청취해 조사의 신뢰성을 확보하면서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