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탐식, 인간을 삼키다
수정 2026-08-18 00:19
입력 2026-08-17 23:53
영화 ‘오디세이’ 충격적 탐식 장면
인간 속 짐승 모습 드러내는 장치
식탁도, 정치·경제도 나눔이 필요
지난 5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누적 관객 수 500만명을 돌파하며 가파른 흥행세를 이어 가고 있다. 나는 마녀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에게 정체 모를 스튜를 먹이는 장면에 놀라 극장을 두 번 찾았다. 두 번째로 볼 때는 궁금증이 달라져 있었다. 이 장면이 왜 그토록 속을 뒤집어 놓았는가가 아니라, 놀런이 굳이 탐식을 이토록 집요하게 그린 이유가 무엇인가였다.‘오디세이아’를 읽으면 실마리가 보인다. 서른 행마다 식사 장면이 등장하는 이 서사시는 향연과 반향연의 반복으로 짜여 있다. 제우스가 정한 손님 접대의 법, 크세니아는 명확했다. 주인은 손님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환대해야 했고, 손님은 그 호의를 배반해서는 안 되었다. 이를 어기는 것은 제우스를 거역하는 죄였다. 그러나 오디세우스 자신부터 이 법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는 ‘목마’라는 선물의 함정으로 트로이를 정복하고서야 고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놀런 감독은 이 문명 파괴에 앞장선 오디세우스의 반성을 영화의 줄기로 삼았다.
이 규칙은 ‘오디세이아’ 곳곳에서 깨진다. 외눈의 거인 키클롭스는 손님으로 찾아온 오디세우스 일행을 잡아먹어 주인의 의무를 저버렸고,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소 떼를 도살한 선원들과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손님의 의무를 저버렸다. 방향은 달라도 결말은 하나같이 파멸이었다. 음식은 이 서사시에서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시험대였다.
물론 영화는 추정 제작비만 약 3600억원대에 이르는 블록버스터이며, 키르케의 스튜도 입소문을 노린 상업적 장치라는 계산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놀런이 컴퓨터그래픽 대신 실제 배우의 얼굴을 주무르는 특수분장을 고집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디지털로 매끄럽게 처리했다면 변신은 판타지로 소비되고 말았을 것이다. 게걸스러운 식탐이 선원들을 돼지로 만든 것이다. 탐식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바꾸는 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짐승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사회학자 클로드 피슐러는 공동 식사의 규범이 무너진 자리에서 식욕이 절제할 기준을 잃는 상태를 ‘식생활의 아노미’(Gastro-anomy)라고 불렀다. 키르케 스튜가 유난히 역겨웠던 것은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키르케는 병사들이 탐욕에 물들어 사람을 죽이고 강간했으니 ‘사람’이 아니라 ‘돼지’라고 비웃었다.
피슐러의 진단은 스크린 밖 우리의 밥상에도 적용된다. 방송과 인터넷에 오른 맛집을 찾아가서 줄 서서 먹어도 만족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혹시 맛집 찾기 열기도 우리의 마음속 탐욕이 만들어 낸 반사경은 아닐까.
탐욕은 식탁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주식과 부동산, 반도체 수출 이익의 배분을 둘러싸고 갈등이 난무하고, 정치판의 양극화는 국민을 지치게 만든다. 최근 미국 MZ 세대의 민주사회주의 지지 확산도 같은 맥락이다. 특정 이념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승자 독식 구조에 지친 세대가 호혜로 눈을 돌리는 신호로 읽는 편이 온당하다. 식탁 위는 물론이고 정치에도 경제에도 나눔이 필요하다. 그래야 탐욕이 인간을 삼키지 않는다.
3000년 전 음유시인이 읊조린 경고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삼키기만 하는 자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고를 오늘의 한국 사회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형체 없는 욕망을 좇는 이들과 하루 한 끼조차 벅찬 이들이 같은 골목에 산다. 우리에게도 화면 속 폭식을 지켜보는 대신 이웃과 밥상을 마주하는 자리를 늘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의 배분도, 정치적 반목의 해법도 결국 나누고 함께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극장을 나서며 자문했다. 나는 지금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 내 이웃은 그 답조차 사치인 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은지.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인문학자
2026-08-18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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