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에 어쩔 수 없이 겨눈 총부리… 남북, 상처 딛고 다시 하나 되기를” [월요인터뷰]

임주형 기자
임주형 기자
수정 2026-07-06 00:24
입력 2026-07-05 18:23

[묻고 답하고 통하다] 한국전 美참전용사 루디 미킨스

인천상륙작전·장진호 전투 치른 스무 살 미군, 어느덧 아흔다섯
사탕의 답례로 어린 소년이 그려준 태극기, 수호신처럼 품고 버텨
하룻밤 새 사라진 전우, 다음은 내 차례란 생각… 피란민들 모습도 처참
지금껏 간직한 총알 관통한 벨트·피 묻은 태극기엔 증오 아닌 ‘용서’ 담겨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파병돼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에 참전한 루디 미킨스 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사무실에서 서울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미킨스 옹의 뒤편으로 한국전쟁 당시 어린 한국 소년이 실수로 4괘의 좌우를 바꾸어 그린 뒤 미킨스 옹에게 건넨 태극기가 걸려 있다.


노병이 액자에 담아 76년째 보관한 태극기는 군데군데 붉은 얼룩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흘린 자신의 피라고 노병은 담담하게 말했다. 쌀 포대 자루에 그려진 태극기는 4괘가 좌우로 뒤바뀌어 있었다. ‘건’이 ‘감’의 위치에, ‘곤’은 ‘리’의 자리에 있었다. 노병에게 태극기를 건네준 어린 한국 소년이 급하게 그리느라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노병은 이 태극기를 품에 간직한 채 전투에 임했고 그를 관통한 총탄이 붉은 물을 들였다고 한다.

어느덧 아흔다섯이 된 루디 미킨스 옹은 76년 전의 일을 어제처럼 기억했다. 스무 살 한창의 나이에 미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한국전쟁에 파병돼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미군이 1950년 11~12월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하게 교전한 장진호 전투에선 다리와 팔 등 13곳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임무를 완수해 퍼플하트 훈장(전사자 및 부상자에게 수훈되는 훈장)을 네 차례나 받았다. 4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미국 건국 250주년 기념행사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미킨스 옹을 ‘영웅’이라고 기렸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미킨스 옹의 사무실은 작은 한국전쟁 기념관 같았다. 피 묻은 태극기뿐만 아니라 그가 장진호 전투 당시 전우들과 찍은 사진, 전투 상황을 조명한 영문 잡지, 한국전쟁을 기리는 배지 등으로 가득했다. 워싱턴DC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 ‘자유는 희생 없이 지킬 수 없다’(Freedom is not free)도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미킨스 옹은 곧 바스러질 것 같은 오래된 낡은 가죽 혁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착용한 벨트였는데, 삼각형 모양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총탄이 관통한 흔적이었다.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증오가 아니라 용서였다. 그는 “중공군도, 북한군도 명령을 받았을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이어 “남한과 북한도 이제 전쟁의 상처를 딛고 하나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기원했다. 다음은 한국전쟁 76주년인 지난달 25일 버지니아주의 한 사무실에서 미킨스 옹과 만나 나눈 일문일답.

-미 해병대에 입대한 계기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주방위군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친구 2명과 함께 공수부대에 입대하고 싶었다. 공수부대의 고공 낙하 훈련이 멋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라 공수부대 정원이 매우 적었다. 한 명만 입대할 수 있고 나머지 둘은 2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 중 한 명이 제안했다. ‘셋이 함께 입대할 거면 해병대로 가자’. 해병대에 입대하기 위해선 먼저 주방위군을 제대해야 했다. 전역 신청서를 받은 주방위군 담당자는 우리가 해병대에 간다고 하니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병대에 입대한 날이 1949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기 정확하게 1년 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어떤 임무를 맡았나.

“나는 포병이라 보병처럼 직접적으로 탄환에 노출되진 않았다. 하지만 배에서 크레인을 이용해 박격포를 들어 올린 뒤 해변으로 옮기는 고난도 임무를 맡았다. 박격포 한 문은 10명의 대원이 팀으로 운용한다. 하지만 박격포를 운송하는 수륙강습 차량엔 6명만 탈 수 있었다. 해병대원인 나는 차량에 탑승하는 한 명으로 선발됐고, 예비군 출신도 꽤 섞여 있었다. 예비군은 정말로 아무 훈련도 받지 않은 채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이었다. 배 뒤편에서 그들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쳐야 할 정도였다. 박격포를 실은 차량 바퀴가 갯벌에서 헛돌아 애를 먹었다. 다행히 불도저 한 대가 우리 차량을 견인하면서 무사히 포를 해변에 배치할 수 있었다.”

워싱턴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에 새겨진 ‘자유는 희생 없이 지킬 수 없다’(Freedom is not free)는 글귀가 담긴 액자.


-장진호 전투 당시 기억을 들려달라.

“장진호 전투는 미국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 직후 시작됐다. 우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금속 식판에 담긴 따뜻한 음식을 제공받았는데 다 먹기도 전에 얼어버렸다. 정말 엄청난 추위였다. 1950년 11월 27일 밤,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총공세를 가했다. 우리는 밤새도록 포를 쐈다. 하지만 추위로 인해 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원래는 분당 8~10발 정도 발사할 수 있는데, 2~3발밖에 쏘지 못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 포병인 나도 보병으로 차출됐다. 엄청난 수의 적군이 파도처럼 몰려왔고 조준할 필요도 없이 그냥 총을 쏴야만 했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됐을 때 사방에 널려 있는 시신이 보였다.”

-액자에 담아 소장하고 있는 태극기의 사연은.

“인천상륙작전을 마치고 인천에 머물며 원산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시기로 기억한다. 열 살 전후로 보이는 ‘김’이라는 어린 소년이 나를 찾아와 ‘도와드릴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탕이나 전투식량을 받는 대신 우리한테 뭔가 답례를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나는 ‘한국 국기를 한 장 구해다 주면 좋겠다. 다만 우리가 언제 이동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그러겠다’고 답한 뒤 3시간 만에 태극기를 가져왔다. 보면 알겠지만 소년이나 가족이 쌀 포대 자루에 직접 그린 것이다. 급히 마련하느라 태극기 괘를 잘못 그린 것 같다. 이 태극기를 나의 수호신처럼 몸에 지니며 장진호 전투 등에 임했다. 전쟁이 끝난 후 태극기를 액자에 담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실제로 겪으면서 보고 느낀 전쟁의 참상은.

“어제까지 함께 했던 전우가 다음 날 죽어 있는 것을 보면 내가 다음 차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포병에서 보병으로 차출된 전우 한 명이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소식을 내게 전한 다른 동료는 말 그대로 ‘셸 쇼크’(shell shock·전쟁성 정신 이상) 상태였다. 얼굴만 봐도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걸 알 수 있었다. 군인이 아닌 피난민들의 모습도 정말 처참했다. 어른들은 등과 머리에 한가득 짐을 멨고, 그들을 따르는 아이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애꿎은 희생자도 많았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던 피난민 중에는 북한 억양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첩자로 몰려 처형당한 이들도 있었다. 전쟁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인류의 비극이자 결코 반복돼선 안 되는 재앙이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에 대한 감정은.

“워싱턴DC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 동양인 남성이 다가와 ‘나의 할머니가 미군 용사를 만나면 꼭 대신 사과드리라고 했다’며 말을 건넸다. 무슨 사연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중공군 복장을 하고 있는 그의 할머니였다. 그는 ‘할머니가 강제 징집돼 한국전쟁에 파병됐다. 한국군과 미군에게 총을 쏘고 싶지 않았지만 명령을 거부하면 할머니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며 미안함을 전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북한군과 중공군도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추호도 없다.”

-남과 북이 앞으로 어떤 관계이기를 바라나.

“한국군과 미군은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남한의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었다. 한국은 지금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꼭 통일되기를 희망한다. 미국도 남북전쟁을 겪었지만 하나가 됐다. 1995년 나와 참전용사들은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판문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북측 구역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는데, 북한군 병사들이 뒤에서 우리를 노려봤다. 그들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한국전쟁의 참상이 너무 크다 보니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과 북이 언젠가는 이런 앙금을 털고 다시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루디 미킨스는

1931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출생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 해병대에 입대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파병돼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입은 부상으로 이듬해 전역했고, 이후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뒤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미 정부로부터 네 차례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글·사진 워싱턴 임주형 특파원
2026-07-0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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