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버겁다…때로는 가장 정치적인 영적 지도자 교황[글로벌인사이트]

안석 기자
안석 기자
수정 2026-04-21 17:21
입력 2026-04-21 17:21


서임권을 주장하다 폐위된 황제가 맨발로 눈 위에서 사흘간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다는 ‘카노사의 굴욕’, 세속 권력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다 교황청이 이전된 ‘아비뇽 유수’와 같은 사건들은 ‘교황권 대 왕권’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이 같은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도 교황과 현실정치가 충돌하는 사례는 반복되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현실정치와 교황의 관계를 짚어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트루스소셜 계정에 올린 합성 이미지. 트루스소셜 캡처



●반공 외친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주의 독재와 맞서며 냉전 해체에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교황 선출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던 1979년 그는 공산독재에 신음하던 폴란드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동구권을 흔들었다. 당시 그의 방문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들도 적지 않다.

요한 바오로 2세 재임기인 1984년 바티칸은 미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미국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레이건 미 행정부는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바티칸과 동유럽 공산정권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미국의 정치·군사적 힘과 교황의 도덕적 권위가 암묵적인 동맹을 맺고 공산주의 붕괴를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도 “요한 바오로 2세가 없었다면 동유럽이 그렇게 평화적으로 변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쟁 반대는 교황의 숙명

역대 교황들은 재임 기간 전 세계 분쟁지역을 돌며 평화와 전쟁 종식을 기원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히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지 세계인들의 관심이 쏠렸다.

역대 교황 가운데 정치적 목소리를 가장 자주 냈던 것으로 평가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전쟁 반대 메시지를 내며 러시아의 불만을 샀다. 전쟁이 발발한 2022년 10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며 “폭력과 죽음의 악순환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당시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이에 “핵전쟁의 위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었다.

반대의 평가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러시아의 침략 책임을 명확히 가리키지 않거나 우크라이나에 협상을 권유하는 듯한 발언을 하며 비판받기도 했다. 2023년 러시아 가톨릭 청년들과의 화상 만남에서 “여러분의 유산을 잊지 말라. 여러분은 위대한 러시아의 후예”라고 말해 러시아 제국주의를 미화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레오 14세 교황. AFP 연합뉴스


●미국 출신 교황 대 미국 대통령

교황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당연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레오 14세 현 교황의 충돌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미국 출신 교황이 선출됐을 때만 해도 “큰 영광이고 흥분되는 일”이라며 두손을 들고 환영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과는 대선후보 시절 때부터 충돌했던 트럼프로서는 미국 출신 교황의 탄생이 내심 반가웠을지 모른다. 실제로 레오 14세는 전임 교황과 비교해 개혁적인 색깔이 옅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허니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취임 초기만 해도 현실 정치에 대해 선뜻 발언하기를 꺼리는 듯했던 레오 14세는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이민 정책과 미국 우선주의 외교 정책 등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를 불렀다.

한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중동전쟁이 마음처럼 되지 않자 화풀이하려 했던 것이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3일 트루스소셜에 “교황 레오는 범죄 문제에 대해 나약하고 외교정책에서도 매우 부적절하다”, “내가 백악관에 없었다면 레오도 바티칸에 없었을 것이다”는 등의 ‘저격 글’을 올리며 교황과의 전쟁에 나섰다. 지난해 교황 합성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는 ‘예수 행세 이미지’를 올리며 비판을 자초했다.

미 정가에서는 어떤 전쟁도 자신만만한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교황은 쉽지 않은 상대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반 세속 지도자와 달리 교황을 상대로는 관세나 미사일 등의 압박 수단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11월 중간선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 정치매체 더 힐은 “중간선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공화당으로서는 반가톨릭 정당으로 인식되는 것을 가장 피해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교황과 갈등을 빚으면서 민주당이 11월 선거에서 상하원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가톨릭 표를 얻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짚었다. 현재 미국 가톨릭 신자는 5300만명으로 추산된다.

김주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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