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살까지 살고 싶었던 80대 ‘청년’ 정주영의 열정[창업주의 비밀노트]

하종훈 기자
하종훈 기자
수정 2026-04-21 07:24
입력 2026-04-20 17:44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1984년 2월 충남 서산 천수만 간척지 현장에서 작업 지시를 하고 있다.
서울신문 DB


“일을 그만두기에는 아직 너무 젊기 때문에 120세까지 일하겠다. 아직 할일이 많기 때문이다.”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창업주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999년 독일 슈피겔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84세 노인이 장수(長壽)에 대한 욕심으로 한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무언가를 ‘일구는 자’이자 청년이고 싶다는 지독한 현역 정신의 선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2026년 현재 111세의 나이로 여전히 현업을 지켰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까요.


삼성 제쳤던 ‘재계 1위 현대’ 신화 주역 “난 부유한 노동자일뿐”현재 재계 서열은 삼성, SK, 현대차그룹, LG로 이어지지만 30년 전인 1996년에는 현대그룹이 1위였고 삼성, LG, 대우가 뒤를 이었습니다. 건설부터 자동차, 조선, 전자까지 현대의 깃발이 꽂히지 않은 곳이 없던 시절입니다. 세계 9위의 부호였던 정 창업주는 본인을 ‘성공한 자’라는 박제된 틀에 가두지 않고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까지 ‘현역’이길 원했습니다.

정 창업주는 “나 자신을 자본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아직도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해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역 정신’이 일궈낸 업적들은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이정표가 됐습니다. 강원도 통천에서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했던 소년의 기적은 1971년 500원짜리 지폐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조선소를 지을 돈도 기술도 없던 시절, 그는 지폐 속 거북선을 보여주며 영국 차관을 끌어왔고 오늘날 HD현대의 모태인 현대중공업의 시초였습니다.



당시 정 창업주는 직원들에게 영국의 바클레이즈 은행과 협상을 시작하게 했는데, 바클레이스 측이 현대의 신용을 미덥지 않게 봐서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에 정 창업주는 해양엔지니어링 회사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의 추천서를 얻고자 롱바톰 회장에게 거북선 그림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다”고 호소했습니다. 현대건설이 쌓아온 고리 원자력 및 정유공장 건설 경험도 데이터로 제시하며 ‘대형 구조물을 만들 역량’을 증명했고, 이를 통해 추천서를 얻었습니다. 또한, 그리스의 선주로부터 배를 주문받을 때도 시장가보다 낮은 파격적인 가격과 더불어, 선수금 반환 보증 및 하자가 있을 시 전액 환불하겠다는 서구식 리스크 관리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켰습니다.

“해보기나 했어?” 뚝심의 리더십1976년 정 창업주의 현대건설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비는 9억 3000만 달러였습니다. 이 금액은 당시 대한민국 전체 예산의 4분의 1에 육박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단 한 건의 프로젝트로 약 150조원 규모(2026년 예산 기준)의 공사를 따낸 것과 맞먹는 충격이었죠. 전 세계 건설사들이 “한국이 무모한 도박을 한다”며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던 프로젝트였습니다.

현장의 가장 큰 적은 섭씨 40~50도를 웃도는 폭염이었습니다. 한낮의 열기에 장비는 달궈지고 작업 효율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정 창업주는 작업 방식을 바꾸는 선택을 했습다. 대형 조명 장비를 동원해 야간 작업을 확대하고, 사실상 24시간 공사를 이어가는 체계를 구축한 것입니다. 공기 단축을 통해 비용 부담을 줄이려는 전략적 판단이기도 했습니다.

주베일 공사의 핵심은 바다 밑에 설치되는 대형 해양 구조물 ‘자켓’이었습니다. 문제는 현지 제작 인프라가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현대건설은 이 구조물을 국내에서 제작한 뒤 해상으로 운송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품질을 확보하면서도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태풍을 만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정 회장은 “해보기나 했어?”라며 밀어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현대건설은 공기를 맞추며 공사를 완료했고, 현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빛난 ‘정주영식 외교’정 창업주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도 헌신했습니다. 1981년 정 창업주는 전국경제인연합회(한국경제인협회의 전신) 회장으로 정부로부터 올림픽 유치 업무를 떠안게 됐는데 같은 해 9월,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린 독일 바덴바덴에서 한국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비아냥을 들었습니다. 상대는 완벽한 인프라와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일본의 나고야였죠.

정 창업주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관료 중심의 딱딱한 유치 작전을 폐기했습니다. 그는 호텔에 진을 치고 IOC 위원들의 동선을 파악했습니다. 일본 측이 화려한 연회와 고가의 기념품으로 공세를 펼칠 때, 정 회장은 위원들의 숙소에 매일 아침 싱싱한 꽃바구니를 보냈습니다. 위원들의 부인들에게는 한국의 미(美)가 담긴 한복을 선물하며 감성을 공략했습니다. 결국 “올림픽은 돈으로 치르는 잔치가 아니라, 평화와 열정의 축제”라는 그의 논리는 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결과는 52 대 27로 서울의 승리. 전 세계가 경악한 ‘바덴바덴의 기적’은 철저한 현장 분석과 사람의 마음을 읽는 정주영식 외교의 승리였습니다.

1984년 서산 천수만 간척 사업은 정주영의 ‘창의적 공법’이 정점을 찍은 사건입니다. 마지막 270m 구간, 초속 8m의 살인적인 물살 앞에 현대건설의 모든 중장비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당시 전문가들은 “이 구간을 막으려면 20만t의 바위와 최소 45개월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정 창업주는 현장에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던집니다. “다 쓰고 버릴 32만t급 초대형 유조선으로 물길을 막아버려라.”

이른바 ‘정주영 공법’의 시작이었습니다. 해체 직전의 유조선 ‘워터베이호’를 예인해 정확히 구멍 난 물길 위에 가라앉히자 거센 조수가 멈췄습니다. 45개월이 걸릴 공사는 단 9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1985년 2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열린 ‘포니 엑셀’ 신차 출시 기념회 현장에서 웃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무모한 도전의 밑바탕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철학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DNA는 2026년 현재, 범현대가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세계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이제 세계 3위의 완성차 기업을 넘어 인간의 노동을 돕는 ‘피지컬 AI’의 선두 주자로 진화했고, HD현대는 미국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을 다시 위대하게)의 핵심 파트너가 됐습니다.

분가한 범현대가…‘120세 현역 정신’ 증식정 창업주가 지금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현대그룹이 분열되지 않고 현대자동차그룹과 HD현대, 현대백화점그룹 등은 단일 경제 블록으로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현대 제국’은 너무 공고해서 오히려 ‘혁신과 변화의 속도’는 늦춰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손자 세대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같은 젊은 리더들이 독자적인 경영 감각을 꽃피우기 어려웠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3위로 도약한 것은 ‘자동차 전문 기업’으로서 기민하게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성취이기도 합니다. HD현대는 조선과 에너지에 집중해 미국의 파트너가 됐습니다. 현대가 하나로 묶여 있었다면, 어느 한 분야의 위기가 그룹 전체로 번지는 시스템 리스크에 취약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가 독립된 엔진을 달고 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나뉘어 각자의 정점에 선 현대’의 모습은, 창업주가 꿈꿨던 ‘120세 현역’의 정신이 각 계열사라는 아바타들을 통해 더 건강하게 증식된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하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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