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500년 미술사 논쟁에 종지부 찍었다 [달콤한 사이언스]

유용하 기자
수정 2026-04-20 14:00
입력 2026-04-20 14:00
스페인 르네상스 거장 엘 그레코 말년작 논쟁
‘그리스도의 세례’ “공방 제자들의 작품”
AI “노환으로 화풍 변화…거장 혼자의 것” 결론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인 엘 그레코(1541~1614)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본명이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인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양식을 독특하게 결합한 화풍으로 유명하다. 극적인 색채, 길게 늘어진 인체, 영적인 분위기가 특징으로 말년에는 뇌졸중을 겪어 후기 작품들은 공방 조수들이 그렸는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이어져 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퍼듀대 인류학과,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 물리학과, 미술사·미술학과, 컴퓨터·데이터과학과, 프릭 피츠버그 박물관 겸 식물원, 클리블랜드 예술 연구소 회화과, 스페인의 문화유산 보존 비영리 기구인 팩툼 재단 공동 연구팀은 엘 그레코의 말년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를 새로 개발한 인공지능(AI) 기계학습 도구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공방 조수들과 공동 작업이 아니라 엘 그레코 단독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20일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기초과학 및 공학 분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즈’ 4월 17일 자에 실렸다.
위키피디아·클리브랜드 미술관 제공
연구팀은 이번 분석을 위해 ‘PATCH’(패치·이질성 분류를 위한 쌍 배정 훈련)이라는 AI 도구를 개발했다. 패치의 작동 방식은 이렇다. 우선 그림을 정밀 스캔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림 속 서로 다른 부위 가운데 미세 구조가 유사한 쌍을 찾아낸다. 회화 분석에는 X선 형광 분석, 적외선 반사 촬영, 광학 간섭 단층 촬영 같은 다양한 물리·화학적 분석 기술이 동원되는데 이를 통해 붓질의 질감, 물감의 두께, 안료 분포 등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극미세 수준의 패턴을 비교하고 그 결과값을 통해 유사하다고 판단된 부위들은 동일 화가가 동일한 조건에서 그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네트워크 분석 기법을 활용해 이런 동일 쌍들을 묶어 공통된 특성을 가진 집단을 ‘커뮤니티’로 묶는다. 소셜미디어(SNS)에서 자주 교류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그룹으로 묶이는 것과 유사한 원리다. 마지막으로 AI 알고리즘이 각 커뮤니티가 얼마나 뚜렷하게 구별되는지 수치화한다. 수치 결과를 ‘Q 점수’라고 부르는데, Q값이 낮으면 커뮤니티들이 서로 비슷하다는 의미로 동일인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고 Q값이 높으면 커뮤니티 간 차이가 크다는 의미로 여러 사람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패치를 검증하기 위해 엘 그레코의 두 작품을 분석했다. 우선 엘 그레코 단독으로 그린 것이 확실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패치 분석 결과 두 개의 커뮤니티가 확인됐고 Q값은 매우 낮게 나왔다. 한 사람이 완성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기존 미술사가들의 분석과 일치한다. 이어 논란의 중심에 있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분석했다. 이 작품은 엘 그레코가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되던 말년에 공방 도제들이 그의 화풍을 모방해 완성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패치 분석 결과 그리스도의 세례에서는 네 개의 뚜렷한 커뮤니티가 확인됐고 그중 일부는 다른 화가의 작업으로 의심받은 부위와 일치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존 학설을 뒷받침한 것처럼 보이나 결정적으로 Q값이 엘 그레코가 혼자 그린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게 나왔다.
연구팀은 낮은 Q값이 나온 이유에 대해 서로 다른 커뮤니티로 나뉜 부위들은 여러 화가의 손길이 아니라 거장 자신의 개인적 화풍이 질병이든 노화로든 어떤 이유로 변해온 것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뇌졸중과 노화로 인한 신체 변화가 붓질과 표현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엘 그레코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연구를 이끈 앤드류 반 혼 퍼듀대 박사는 “숨겨진 패턴을 찾아낼 수 있는 패치 분석은 논란이 되는 미술품 감정은 물론 의료 영상 분석, 농업 원격 탐사, 도시 개발 및 설계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예를 들어 의료 영상에서 조직의 미세한 구조적 차이를 군집화하거나, 위성 사진에서 작물의 생육 패턴을 분류하는 데 같은 원리를 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용하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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