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기둥도 안다, 그대가 나임을…19일 남원 실상사 한글주련 모심법회

손원천 기자
손원천 기자
수정 2026-04-11 11:00
입력 2026-04-11 11:00
“미처 몰랐네/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이었음을/미안해 미안해 미안해/이제 알았네/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이었음을/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남원 실상사 휴휴당에 걸릴 주련. 실상사 제공.


절집 기둥에 내걸릴 여섯 폭의 주련(柱聯)에 담긴 문장이다. 전북 남원시 지리산 실상사의 회주인 도법 스님이 지은 이 한글 시가 나무판 위에 새겨져 세상과 마주하게 됐다.


지리산 실상사 주지인 승묵 스님은 10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일 실상사 템플스테이 시설 휴휴당(休休堂) 마당에서 ‘휴휴당 주련 모심 법회’를 연다”고 밝혔다. 2025년 ‘편액 모심’에 이은 두 번째 봉안 의식으로, ‘문자반야(文字般若) 프로젝트’ 2차 사업의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다.

휴휴당은 2013년 지어진 템플스테이 전용 공간이다. 이름 그대로 ‘쉬고 또 쉬는 집’이다. 그런데 정작 지어진 이후 12년 가까이 편액이나 주련 하나 없이 운영돼 왔다. 사찰 건축에서 편액과 주련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해당 공간의 정신과 철학을 문자로 선언하는 일이다. 빈 기둥은 그 선언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뜻했다.

이번 주련 불사의 핵심은 글씨다. 편액과 주련의 글씨를 맡은 이는 서예가 김종원 작가다. 글씨와 그림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서화동체’(書畫同體) 작업으로 잘 알려진 김 작가는 전서체를 근간으로, 모든 문자를 한글로 썼다.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한글 주련 모심법회’ 기자회견에서 안상수(오른쪽) 추진위원이 한글 주련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훈민정음 창제 원리인 ‘자방고전’(字倣古篆)이 있다. 한글 자모의 형태가 고대 전서체를 본떴다는 원리다. 김 작가는 “한글과 한자를 범용했을 때 어긋나지 않는 형태, 훈민정음의 정신을 그대로 현판에 넣었다”며 “한글과 한자가 같은 구조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 서로 용융되어야 할 현재 양극화 문제와도 습합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자의 조화가 미학적 실험을 넘어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휴휴당 현판 가운데 글자는 특히 눈길을 끈다. 전서체의 ‘휴(休)’ 자 두 개를 마주 붙여 하나의 조형으로 만들어냈다. 좌우 대칭의 기하학적 구조가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각자(刻字)는 김각한 각자장(국가무형문화재)이 맡았다. 음양각(陰陽刻) 기법으로 한글 전서 위에 특유의 비백(飛白, 붓이 빠르게 스칠 때 생기는 여백의 효과)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휴휴암 한글 주련. 실상사 제공.


사찰의 주련은 오랜 세월 한문(漢文)의 영역이었다. 불교 경전의 구절이나 선사의 게송이 한자로 새겨지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 관행에 균열을 내온 곳이 실상사다. 실상사는 이미 천왕문 주련을 안상수체 한글로 달았고, 선재집 현판도 한글로 써 걸었다.

이번 주련 문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경전의 구절도, 선사의 법어도 아닌, 도법 스님이 직접 지은 한글 시다. “그대가 나임을”이라는 구절이 여섯 폭에 반복 변주되며, 몰랐음의 참회와 알았음의 감사를 오간다. 불이(不二)의 세계, 즉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는 불교적 통찰이 일상의 언어로 주련에 표현돼 절집 기둥에 걸리게 됐다.

추진위원으로 참여한 이동국 전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가장 간단하고 궁극적인 문자 구조를 가진 것이 한글이며, 이를 원점에서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이번 주련”이라고 평했다.

‘문자반야 프로젝트’는 실상사가 추진하는 장기 문화 불사다. 이동국 전 경기박물관장, 안상수체로 유명한 타이포그래피 아티스트 날개 안상수, 전 국가유산청 문화재위원인 흥선 스님 등이 추진위원으로 함께하고 있다.

손원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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