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배구 추락에 칼 빼든 차상현…“누군가는 희생해야죠” [스포츠 라운지]

류재민 기자
류재민 기자
수정 2026-04-10 01:46
입력 2026-04-10 00:47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 자원한 차상현

한국, FIVB 40위로 대만보다 아래
車-이숙자 코치, 체육회 승인 수순
“亞선수권·아시안게임 3위면 성공”

혹독한 훈련·부드러운 소통 기대
수비력 뒷받침 ‘정교한 배구’ 추구
“욕은 나한테, 응원은 선수들에게”
차상현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지난 8일 경기 수원시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대표팀 운영에 대한 구상을 밝히고 있다. 도준석 전문기자


“누군가는 희생해야죠. 선수들이 얼마만큼 변화해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만들지, 선물 상자를 열기 전처럼 설레는 기분입니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4강 신화를 이루며 전 국민에 감동을 줬던 때가 있었다. 김연경(38)이라는 걸출한 스타와 함께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의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불과 몇 년 전 한국 여자배구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영광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패배를 거듭하며 끝없이 추락했다. 2024 파리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는 물론 지난해 7월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는 1승 11패의 성적을 남기고 결국 VNL에서 강등되는 수모도 겪었다. 9일 기준 FIVB 랭킹은 40위. 일본(5위), 중국(6위)은 물론 태국(18위), 베트남(28위), 대만(37위)보다도 밀리는 실정이다.

당장 성적을 내기 힘드니 서로 감독을 맡길 꺼리는 게 현재 여자배구 대표팀의 현실이다. 감독 자리가 ‘독이 든 성배’가 돼 버린 속에서 차상현(52) 감독이 나섰다. 지난 8일 경기 수원시 한 카페에서 만난 차 감독은 대표팀 감독에 지원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고,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누군가가 욕먹을 각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차 감독은 이숙자(46) 전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을 수석코치로 대한배구협회 대표팀 지도자 공모에 단독으로 신청했다. 지난 1월 이미 선임됐지만 지난달 대한체육회가 절차적 하자를 이유로 들어 승인을 거부하는 바람에 재공모 절차를 거쳐야 했다. 협회는 요건을 보충해 지난 8일 두 사람에 대한 이사회 승인을 마쳤고 체육회의 최종 승인만 남은 상태다.



대표팀은 오는 20일 소집돼 당장 6월 아시아배구연맹(AVC) 네이션스컵을 대비해야 한다. 이후 8월 아시아선수권, 9월 아이치·나고야아시안게임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를 통해 재신임 평가를 받는 차 감독에게 눈앞에 다가온 일정은 지도자로서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자 한국 여자배구의 부활 여부를 가를 중요한 분수령으로 꼽힌다.

차상현 감독이 GS칼텍스를 이끌고 2020~21 V리그 여자부 통합우승을 차지한 뒤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한국 여자배구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도로 볼품없게 된 현실을 차 감독은 냉정하게 진단했다. 그는 “더 물러날 곳이 없는 데까지 밀려나 있다. 나와 선수들 모두 냉정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한국 여자배구는 세계 40위권이라 한 수 배우고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90% 정도는 선수단 구상을 마쳤다”면서 “아시아선수권 3위,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따내면 100% 달성이 아니라 오버한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과 일본이 다른 차원의 전력을 가진 만큼 3위는 한국이 현실적으로 내걸 수 있는 최대 목표치이기도 하다.

현실이 녹록지 않지만 차 감독이기에 배구계는 기대를 걸고 있다. GS칼텍스를 이끌며 여자배구 최초의 트레블(컵대회·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해설위원까지 역임하며 풍부한 경험과 넓은 시야를 갖춘 준비된 지도자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GS칼텍스 시절 선수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그의 큰 장점으로 꼽힌다. 훈련할 때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강하게 몰아붙이지만 훈련이 끝나면 벽을 허물고 부드럽게 다가간 덕에 선수들도 삼촌 혹은 아빠처럼 믿고 따르기로 유명하다.

2024년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1월까지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차상현 감독. 한국배구연맹 제공


차 감독은 “감독을 안 하고 나와 있으면서 스트레스가 절반 이상 줄었다”고 웃으면서 “해설위원을 하면서 7개 팀 전체 선수를 분석하고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서 중심을 잘 잡아가는 게 중요하다. 운동은 운동답게 정확하게 시키고, 선수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고민도 듣고 벽을 빨리 깨려고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김연경처럼 20점 이후 승부에서 믿고 맡길 특출난 에이스가 없는 만큼 차 감독은 ‘정교한 배구’를 대표팀의 색깔로 입힐 계획이다. 그는 “에이스의 한방보다는 팀플레이를 얼마나 잘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면서 “리시브와 수비를 잘 해내고 정확히 패스해서 정교한 배구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격 기회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수비가 먼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지론인 그는 대표팀이 소집되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공을 받아야 하는지 중점적으로 연습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욕먹을 준비는 됐다”고 말하는 모습에선 비장함도 느껴졌다. 선배들에게 물려받았던 것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면서도, 지금 자신이 가진 고민의 크기를 조금이라도 줄여서 더 좋은 환경을 물려주는 게 그의 궁극적인 목표다.

차 감독은 “결과가 좋으면 칭찬받는 것이고 나쁘더라도 소신 있게 한다면 분명히 인정받는 때가 올 것”이라며 “여자배구를 걱정하고 응원하신다면 욕은 나한테 하고 선수들에게는 응원 메시지만 남겨달라”고 당부했다.

류재민 기자
2026-04-10 B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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