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선물’과 같은 시간이 있었다. 창덕궁 옆 작은 카페에서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이수지와 소설가 김연수, 음악 듀오 솔솔이 함께 마련한 ‘눈 내리는 삼일포’ 토크콘서트에 참석했다. 현장을 찾은 관객들은 좀먹은 18세기 그림에서 시작된 영감이 그림책이 되고 그림책이 다시 소설과 음악이 되는 순간을 함께 목격하고 즐겼다.
이야기는 2022년 5월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시작된다. 당시 미술관은 소장품의 일부를 복원·보존 처리해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중에는 현재 심사정(1707~1769)이 그린 ‘삼일포’가 있었다. 삼일포는 금강산에서 흘러나온 신계천이 36개 봉우리에 가로막혀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신라 화랑들이 들렀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사흘 동안 머물렀다고 전해져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림은 쪽빛 배경 곳곳에 하얗고 동글동글한 눈이 내려 운치를 더한다.
사실 여기에는 멋진 이야기가 숨어 있다. 눈처럼 보이는 흰 점은 좀이 갉아먹어 구멍이 난 흔적으로 화첩 속에 접혀 있던 까닭에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대칭으로 예쁘게 구멍이 났다. 담당 학예사는 이 구멍들을 보이지 않게 메울 것인지 고민했지만 그동안 관람객들이 구멍을 그림의 일부로 사랑해 온 역사를 감안해 결국 ‘눈 내리는 모습’을 유지한 채 복원했다.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이수지는 2024년 ‘눈 내리는 삼일포’라는 그림책을 선보였다. 그는 ‘삼일포’의 장면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살을 붙여 그림책을 완성했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쌓여 가더니 마침내 화면을 온통 하얗게 채우면서 끝난다. 구멍이 뚫린 표지도 인상적이다.
그림책은 김연수에게 또 다른 영감이 됐다. 그는 동명의 소설을 지난해 1월 ‘현대문학’ 70주년 기념 특대호에 실었다. 그리고 주석에 “서울 서촌의 한 음식점에서 이수지 작가가 한 장씩 넘기며 ‘눈 내리는 삼일포’를 보여 줬다. 이 소설은 그 순간부터 쓰이기 시작했기에 이렇게 밝혀 둔다”고 적었다. 17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어의에게 학질(말라리아)에 걸린 딸을 살려 달라며 ‘덕암’이라는 남자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솔솔은 동명의 제목으로 조선시대 정가(감정을 절제하고 품위 있게 부르는 전통 성악곡) 형식의 음악을 만들었다.
토크콘서트에서는 이수지의 그림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상과 김연수의 낭독이 어우러졌다. 솔솔은 기교와 감성을 깊게 담아내는 시창의 선율을 통해 눈이 내리는 순간의 서정과 시간의 흐름을 담아냈다. 여기에 해금과 피리 연주가 더해져 깊이를 더했다.
옛 예인들의 경연을 봤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각자의 분야에서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진정한 풍류의 장에 초대된 것 같았다.
예술이란 멈춰 있는 유물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끊임없이 흐르는 대화와 같다. 좀 먹은 흔적을 지우는 대신 현 시대의 관람객이 작품과 함께한 역사를 고려한 학예사의 안목, 그리고 글과 그림, 음악으로 키워낸 예술가들의 화답에서 예술이 가진 힘을 느낀다.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에서 비롯된 ‘K헤리티지’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뜨겁다. ‘삼일포’가 ‘눈 내리는 삼일포’가 된 것처럼 전통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충분히 쏟아지는 관심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