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위보다 빠른 3위는 왜 구제 못받았나…‘기계적 룰’의 역설

김경두 기자
수정 2026-02-11 16:18
입력 2026-02-11 16:18
쇼트트랙 혼성계주 한국 탈락에 ‘운 없다’고 하지만
‘데이터 기반 판결’ 규정 만들 때 손 놓은 결과일 수도
지난 10일(현지시간)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의 쇼트트랙 혼성계주 준결승 중반전. 대한민국 김길리의 컨디션을 고려했을 때 분명 ‘추월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선두로 달리던 미국의 커린 스토더드가 나 홀로 미끄러졌고, 추격하던 김길리와 충돌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았다. 다친 김길리가 최민정에게 가까스로 터치했지만 결국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리고 모두가 희망을 안고 전광판을 바라봤지만 끝내 한국의 구제를 뜻하는 ‘AD’(어드밴스)는 뜨지 않았다.
오심은 아니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규정(룰)에 따른 ‘기계적 판결’이었다. 그래서 “운이 없었다”고 한다. 일각에선 ‘국제빙상연맹(ISU) 회장(김재열) 보유국’인데 영향력이 너무 없는 것 아니냐, 혹은 역차별을 받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그건 화풀이에 불과하다. ISU 기술위원회에서 한국 선수들에게 불리한 룰이 만들어질 때 손 놓은 결과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번 판정의 근거인 ISU 규정에선 어드밴스 조건으로 ‘충돌 당시 진출 가능한 순위’(qualifying position)를 명시하고 있다. 당시 김길리는 3위였다. 불과 0.1초 뒤면 앞선 선수를 제칠 수 있는 가속도가 붙은 상태였지만, 비디오 판독 화면 속의 ‘정지 영상’에서는 엄연히 3위였다. 과거처럼 쇼트트랙이 심판의 ‘직관’과 ‘정황’을 존중하던 시절이었다면 김길리의 폭발적인 추월 기세는 충분히 참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ISU는 ‘데이터 기반의 판정’을 지향하고 있다. ‘만약 사고가 없었다면 1위로 들어왔을 것’이라는 가정적 추론은 ‘사고 순간 3위였다’라는 현실 기록 앞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스포츠 외교’라고 하면 회장직을 맡거나 VIP석에 앉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올림픽에서의 영향력은 기술위원회의 문구에서 나온다. 최근 몇 년간 캐나다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서구권은 ‘선수 보호’와 ‘판정 객관화’라는 명분 아래 ‘공격적 추월자’에 불리한 세부 지침들을 규정집에 넣었다. 김길리 사례처럼 ‘순위 중심의 어드밴스’ 규정이 강화된 것도 그 흐름 중 하나다.
이들은 이를 토대로 오심이라고 항의하면 ‘규정집(Rule book)에 나온 대로 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이제는 판정의 근거가 되는 규정 자체를 설계하는 힘이 필요하다. 김재열 ISU 회장 시대, 한국 쇼트트랙은 행정의 정점에 서 있다. 하지만 전략을 바꿔야 한다. 예컨대 ‘선두 그룹과 일정 거리(0.5초 이내 등)에 있을 경우, 추월 기세를 고려해 어드밴스를 줄 수 있다’는 식의 정교한 예외 조항을 기술위원회 의제로 던져야 한다.
김길리의 눈물은 아프지만 이번 사태는 국제 스포츠 기술 행정에 접근하는 방식을 정교하게 짜야 한다는 숙제를 남겼다.
김경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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