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그 부엌에는/황수정 수석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수정 2023-05-02 01:47
입력 2023-05-02 01:47
네 살배기 강아지 녀석은 내가 제 엄마인 줄 안다. 졸졸 쫓아다니다 내가 앞치마를 두르면 마음을 놓는다. 달강달강 설거지 소리가 좋아 어쩔 줄 모른다. 뱅뱅이를 돌고 구르고.

예전의 어느 작가는 저녁 짓는 그릇 소리에 어머니가 그립다고 썼다. 나는 도마 소리를 좋아했다. 똑각 똑각, 새벽 잠을 깨워서는 다시 곤하게 재워 주던 엄마의 도마 소리. 밤이 길어 칠흑의 겨울 새벽이면 엄마는 하얀 광목 행주를 깔고 소리도 없이 도마질을 했다. 높고 낮은 우리 집 도마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새벽이 깊은지, 아침이 다 왔는지.

내가 시험을 보는 날 부엌은 아침내 조용했다. “귀한 날, 썰고 자르는 거 아니라 했다.” 전날 밤 엄마는 썰고 다진 것들을 면포에 잘 싸서 도마에 올려 두고는 잠을 청했다.


새벽기도 같고 묵언수행 같던 도마 소리. 그 소리가 나를 지켜 주었을까. 풋잠 꿈결에 선걸음에라도 다녀왔으면. 배꼽이 옴폭 파인 소나무 도마가 있던 집. 내 곁을 지켜 준 도마 소리가 아주 살던 그 오래된 부엌에.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2023-05-02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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