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3] ‘카프’ 김복진의 20세기 불상 조각
수정 2015-09-30 09:14
입력 2015-09-30 09:14
불상으로는 충북 보은 법주사의 미륵대불이 그의 작품이었다. 미륵대불은 김복진이 머리 부분을 완성하고 전체 비례를 잡아놓은 상태에서 자금난으로 중단됐다고 한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미륵대불은 1963년에야 완성됐다. 미륵대불은 흔한 시멘트 조각이라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김복진으로서는 오히려 시멘트라는 새로운 재료를 거대 불상 조성에 이용하는 실험이었다. 미륵대불은 1990년 금동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두 차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도 김복진의 체취는 여전히 남아있다.
미륵전 본존불은 특이하게 커다란 무쇠솥 위에 봉안되어 있다. 참배객들은 삼존불에 배례하고는 무쇠솥과 본존불의 대좌 사이 공간에 시줏돈을 넣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4년 3월 9일 저녁 시줏돈을 거두어 가는 소임을 맡은 동자승이 촛불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솥 내부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불길은 곧바로 소조상 내부 목재에 옮겨 붙었고 본존볼은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금산사는 미륵본존의 복원불사를 추진했다. 공모에는 김복진과 보응 문성, 금용 일섭, 이석성 등이 응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승들인 보응, 금용, 이석성은 서울 안양암의 천오백불상도 함께 조성한 적이 있다. 금산사 미륵불 역시 세 사람이 공동 응모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이당 김은호 화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눈길을 끈다. 김복진에게 금산사 미륵불 복원에 응모를 권유한 것도 이당이었다고 한다.
김복진은 도쿄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뒤 1923년 신극운동 단체인 ‘토월회’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 192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각각 나체 조각 작품으로 입선한다. 이듬해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체상 ‘여인’이 특선에 올랐다. 하지만 김복진은 카프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데다 조선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6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복진의 불상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10점 남짓이다. 금산사 미륵불과 그의 흔적이 여전한 법주사 미륵대불, 서울 영도사 석가모니불입상, 충남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좌상, 충남 공주 계룡산 소림원 미륵입상 등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소림원 불상이다. 석고로 만든 높이 117cm의 소림원 미륵입상은 금산사 미륵불을 조성하기 위한 축소모형이라고 한다. 다만 머리 부분의 비례가 소림원 쪽보다 금산사 쪽이 조금 더 커보이는 것은 높이 올려다 보아야 하는 대형 불상인 만큼 의도적인 조정이라는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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